남한산성 고립 인조를 구하라!… 막강 淸軍 격파
조선 500여 년 역사 동안 최고의 무장들을 조정에서 정리해 기록한 책이 ‘조선명장전’이다 기록. 이 기록에는 조선 무장들을 3등급으로 구분해 100명을 선정했다. 1등급 무장은 단연코 이순신과 권율 장군 등이었다. 조선의 수많은 무장 중에 100명으로 선정된 무사들은 정말 특별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조선명장전’에 선정된 무장 중의 한 명이 바로 김준룡 장군(1586~1641)이다.
그렇다면 김준룡 장군은 어떻게 해서 조선 100인의 무장 중의 한 명으로 선정된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치욕의 병자호란 당시 조선에서 유일하게 승전했기 때문이다. 국왕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삼전도에서 머리를 풀어헤치고 청의 황제 홍타이지에게 항복을 할 정도로 병자호란은 당대뿐만이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치욕의 역사였다.
그런 과정에서 수원 광교산에서 무적의 청나라 군대에 승리했으니 김준룡 장군의 승전은 가히 역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만했다. 이 승리는 단순히 병자호란의 승리만이 아닌 경기 천 년의 역사에서도 빛나는 역사로 평가받아 받아 마땅하다.
■병자호란의 발발과 삼전도의 굴욕
임진왜란 후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은 현명한 외교책으로 국제적인 전란을 교묘히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당쟁의 희생물로 쫓겨나고, 인조가 즉위하자 조정에서는 다시 향명배금책(向明排金策)을 고수했다. 그러나 이것은 후금을 자극해 조선침략의 명분을 제공하는 결과가 되었다. 후금은 인조 5년(1627)에 조선을 침략해 형제의 맹약을 맺었으니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당시 후금은 조선보다는 명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어 조선에 많은 군대를 묶어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묘호란으로 조선과 후금은 형제지국의 맹약을 맺고 강북철병을 약속했으나 청은 이를 어기고 명을 정벌하기 위해 조선에 군량과 병선을 요구하는 등 압력을 가했다. 인조 10년에는 형제관계를 군신의 관계로 고치고 세폐(歲幣)의 증가를 요구했다. 이러한 후금의 강압책은 조선의 배금의식을 한층 높게 했다. 또한 청 태종은 왕호인 한(汗)의 칭호를 버리고 황제의 존호를 사용할 것을 조선에 요구했다. 이러한 청의 강압적인 위압에도 조선은 청나라 사신의 인견(引見)을 거부하고 국서도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8도에 선전교서를 내려 방비를 굳게 하는 등 적의를 보였다.
이러한 현실에서 청은 중국 대륙 남쪽으로 내려간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자신들의 배후에 있는 조선을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황제의 칭호와 아울러 국호를 청이라 고친 태종은 조선원정군 10만을 동원해 인조 14년(1636) 12월 침략을 개시했다. 청 태종은 의주 부윤 임경업이 굳게 방비하고 있는 백마산성을 피해 서울로 직행하니 조정에서는 주화론자(主和論者)인 이조판서 최명길을 적진에 보내 화의를 진행하는 한편, 왕자와 비빈종실(妃嬪宗室) 및 귀족을 강화에 피난시키고, 인조도 뒤따르려 했으나 이미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남한산성으로 피난한 인조는 급히 명에 사신을 보내 원군을 청하고 8도에 격문을 보내어 근왕병을 독촉했다. 이 사이 청군은 남한산성을 포위해 산성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인조 일행이 입성했을 때에 산성에는 1만여 군사가 겨우 1개월 지탱할 수 있을 정도의 분량인 쌀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각종 화기ㆍ궁시 등 수성에 필요한 장비와 혹한기 전투에 필요한 장구들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못한 상태였다. 이렇듯 부족한 병력과 장비로는 남한산성을 근거지로 한 장기적인 수성작전의 실효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것이었다.
■ 김준룡의 광교산 승첩
청의 막강한 군대는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막아버렸고 조선의 군대는 추풍낙엽처럼 스러졌다. 어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파천한 인조는 전국에 의병의 봉기를 지시했고 자신을 구하기 위한 근왕병(勤王兵)을 소집해 남한산성으로 오도록 지시했다. 국왕을 보호하겠다는 근왕병들의 의지는 강했지만 청의 군사력은 너무도 강했다. 중원의 패자였던 대명(大明)의 군대를 물리치고 새로운 황제의 지위에 오른 청 태종은 거칠 것이 없었다. 그가 지휘하는 팔기군은 중국 역사상 칭기즈칸이 거느린 군대 다음으로 강력한 군대였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군대를 강화하지 못하고 당파싸움에 치중하던 조선의 군대는 지리멸렬할 수밖에 없었고 남한산성은 고립무원으로 절망적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 인조를 구하기 위해 남한산성으로 진격하던 김준룡 장군은 청의 군대를 제압할 천혜의 요새를 찾아냈다. 그곳이 바로 광교산이었다. 김준룡이 영솔하는 군사들은 광교산에 이르러 적장 약부양고리(額駙揚古利)를 죽이고 이곳 광교산에서 대승을 거둔 것이다.
김준룡은 인조 때의 무신으로 자는 수부, 본관은 원주이며, 동지중추부사 김두남의 아들이다. 1608년(선조 41)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을 거쳐 황해도, 경상도, 함경도의 병영에 근무했다.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재직하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그는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청병에 포위된 채 고립무원으로 사태가 급박하다는 소식을 듣고 친병(親兵)을 이끌고 근왕병을 모집했다.
그는 근왕병을 이끌고 수원 광교산에 진을 치고 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때 각처에서 모집한 근왕병은 거의 패몰되고, 오직 김준룡이 영솔하는 병사들만이 남한산성 부근에서 활약하는 형편이었다. 그가 민첩한 군병을 선발해 청의 유격기병(遊擊騎兵)을 격파하니 군병들의 사기가 충천했다. 처음 전투에서 패배한 청군은 몽고 공격병 수만을 합해 대병력으로 짙은 안갯속에서 공격해 왔는데 마치 풍우와 같아 일격에 대파할 듯했다.
김준룡은 두려움이 없었다. 그는 칼을 뽑아들고 군사들에게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 피의 절규를 토하고 화살과 투석이 난무하는 곳에 홀로 서서 지휘했다. 그와 함께 목숨을 건 근왕병들은 이 모습을 보고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혈전을 거듭했다. 적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종일토록 격전을 벌였다. 치열한 전투 중에 적의 경기병(輕騎兵)이 몰래 뒷산을 넘어 산봉우리를 점거하고, 화살은 비 오듯 퍼부었다.
그는 급히 용사 수백 명을 내어 올라가라고 독려하면서 “이때야말로 충의 있는 자가 국가의 은혜에 보답할 때이다”라고 외치며 병사들을 독전하니 휘하의 병사들은 일당백의 정신으로 적을 맞아 선전했다.
이때 청군 중 갑주에 말을 탄 장수가 산 위에 홀연히 나타나 큰 기를 세우며 호령하니 적군이 모두 모여들었다. 김준룡은 “저 적장을 죽이지 못하면 적이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독전하며 포를 쏘았다. 김준룡 부대의 포탄에 청 태종의 사위였던 액부양고리라고 하는 적장은 마침내 불귀의 객이 되었고 청의 군대는 헤아릴 수 없는 사상자를 내고 퇴각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 조선군의 사상자는 불과 수십 인에 불과했다.
하루 밤낮의 광교산 전투는 마침내 조선군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연전연패의 참혹함 속에 이 전투로 말미암아 조금이라도 조선군의 체면을 세운 것이었다. 하지만 인조는 근왕병들로부터 구원받지 못했고 마침내 남한산성을 나가 잠실벌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김준룡 장군의 광교산 전투는 우리 역사 속에 가장 치열하고 가장 극적인 전투로 기억되고 있다. 아무도 승리하지 못한 비참한 현실에서의 승리였기 때문이다. 경기인들의 치열한 호국정신이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청나라 군대를 패하게 한 것이다.
■ 채제공의 김준룡 장군 전승비 건립
병자호란 이후 경기지역에서 김준룡 장군의 전승이 알려지게 된 것은 정조시대 화성성역을 준비하던 때였다. 당시 백성이 돌 맥을 찾으러 광교산에 올랐다가 광교산에서 장군의 위업을 듣고 당시 화성 유수였던 채제공 선생에게 알린 것이다. 채제공 선생은 이를 정조에게 보고했고 정조는 충양(忠襄)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당시 정조에게는 충성스런 신하의 모델이 필요하던 때였다.
정조의 명을 받은 채제공 선생은 청나라 군사가 항복했다는 ‘호항곡(胡降谷)’의 자연암벽에 ‘忠襄公金俊龍戰勝地(충양공김준룡전승지)’라고 새기고 좌우에 ‘丙子胡亂公提湖南兵覲王至此殺淸三大將(병자호란공제호남병근왕지차살청삼대장)’이라고 새겼다. ‘병자호란 때 공이 호남의 근왕병을 이끌고 청나라의 세 장군을 죽였다’라고 쓴 것이다. 이로써 병자호란 이후 백성의 기억에서 사라진 김준룡 장군과 당시 군사들의 위업이 드러나게 되었다.
최근 우리는 경기 천 년의 역사를 통해 새로운 21세기를 준비하고 있다. 경기인들이 역사에서 보여준 자주정신은 우리가 계승해야 할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그 중심에 김준룡 장군의 승전이 있다. 김준룡 장군을 기억하는 역사유적의 보존만이 아니라 이를 현양 하는 사업도 적극 추진해야 할 것이다.
김산 홍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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