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대선 도전을 시사했던 반기문 전 유엔(UN) 사무총장이 서민체험에 나섰다가 망신을 당한 바 있다.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1월에 입국했던 반 전 총장은 개인차량 대신 공항철도를 타고 서울 시내로 이동했다. 그런데 승차권발매기의 지폐투입구에 1만원짜리 2장을 겹쳐 넣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혔다.
옆에 있던 측근이 지폐를 한 장씩 넣어줘 표를 살 수 있었다. 며칠 뒤 ‘턱받이’ 사건도 반 전 총장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음성의 사회복지시설 꽃동네를 찾아간 반 전 총장은 누워있는 노인에게 음식을 떠먹여줬다. 턱받이를 환자가 아니라 반 전 총장 부부가 하고 있었다. 국민들은 ‘서민 코스프레’라며 비웃었다. 서민 행보가 역풍을 맞았다.
코스프레는 ‘코스튬 플레이(Costume Play)’의 약자다. Costume(의상)과 Play(놀이)의 합성어로 유명 게임이나 만화, 영화 등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모방해 그들과 같은 의상을 입고 분장을 하며 행동을 흉내 내는 놀이다.
정치인들의 민생 행보가 서민 코스프레란 손가락질을 많이 받는다. 서민의 삶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도움을 주는 정책을 펴기보다 필요할 때 잠깐 흉내만 내기 때문이다. 특히 선거를 앞두고 전통시장을 찾아 꼬치어묵을 베어 먹거나 국밥을 먹는 모습, 과일 한 바구니 사서 검은 봉지에 들고 다니는 모습 등이 그렇다. 서민들 눈에는 정치쇼로 보인다.
최근 박원순 서울시장의 옥탑방 살이가 화제가 되고 있다. 한 달간 서울 강북구의 30㎡ 크기 옥탑방에 살면서 시민들의 불편함과 어려움을 피부로 느끼고 현장에서 민생해법을 찾겠다는 계획이다. 에어컨 없이 사는 박 시장에게 문재인 대통령은 선풍기를 선물로 보냈다.
박 시장은 27일 페이스북에 “삼양동 옥탑방에 선풍기가 들어왔다. 문재인 대통령께서 무더위에 수고한다고 보내셨다”고 밝혔다. 박 시장은 “마치 신접살림에 전자제품 하나 장만한 것처럼 아내가 좋아서 어찌할 줄 모른다”며 부부가 함께 선풍기를 조립하는 사진을 올렸다.
이 글과 사진을 본 많은 사람들이 ‘박 시장이 더운데 고생하는구나’라기 보다, ‘무슨 놀이를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은 “완전 신파 코미디”라며 “에어컨 켜서 맑은 정신에 최대한 열심히 일하는 게 맞지 않을까”라고 했다.
많은 정치인들이 장애인ㆍ임신부 체험을 하고, 자전거나 버스 출근을 하는 등 서민 체험(또는 흉내내기)을 한다. 중요한 것은 절박한 민생 문제를 겉치레보다는 실질적인 정책으로 보여줘야 한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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