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조선 ‘백성 도탄’… 희망의 개혁을 꿈꾸다
-유형원이 21세 때 지은 ‘네 가지 경계함’[四箴]에서 >
스스로를 ‘책만 보는 바보’라 했던 이덕무가 제자 이서구에게 이이의 <성학집요>, 유형원의 <반계수록>, 허준의 <동의보감>을 가장 좋은 책으로 추천하며 읽기를 권했다. 이덕무는 규장각 초대 검서관으로 활약했던 조선 최고의 학자이고, 이서구는 정조와 순조시대에 판서와 정승을 지낸 빼어난 경세가였다. 이들과 어울렸던 연암 박지원은 <허생전>에서 허생의 입을 빌어 “유형원은 일국 군대의 식량을 능히 조달할 수 있는 인재로서 속절없이 바닷가에서 늙는다.”며 개탄하였다.
반계 유형원의 학문을 충실히 계승하여 실학을 집대성한 성호 이익(李瀷)은 이렇게 말했다.
“조선 건국 이래 수백 년 동안에 현실적인 정책을 적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학자는 오직 이율곡과 유반계 두 사람 뿐이다. 그리고 이율곡의 제안은 대부분 실천이 가능한 것이었는데, 반계의 제안은 율곡의 제안을 더욱 발전시켜 근본적인 개선을 주창하고 있으니 그 뜻이 참으로 크다.”
■경기도에서 키운 위대한 꿈
반계 유형원(柳馨遠, 1622~1673) 선생의 묘소(경기도 기념물 제31호)는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석천리 정배산 자락에 있다. 뒤편에는 부친 유흠(柳欽)과 어머니 이씨를 합장한 묘가 자리 잡고 있다. 30여 평 규모의 묘역에는 장대석을 놓고 아래 단에 좌우로 문인석 1쌍을 세웠다. 1768년(영조4)에 세워진 묘비에는 “유명조선국진사증집의겸진선반계유선생형원지묘 증숙인풍산홍씨부좌(有明朝鮮國進士贈執義兼進善磻溪柳先生馨遠之墓 贈淑人豊山洪氏祔左)”라고 쓰여 있다. 비문은 1768년(영조 44) 당시 이 지역을 관할했던 죽산부사 유언지가 짓고, 판중추부사 홍계희가 글씨를 썼다. 담장은 1971년에 묘역을 정화하면서 설치한 것이다. 봉분 앞으로는 경계석이 가지런히 놓여 있으며, 혼유석과 상석, 향로석이 그 중간 부분에 걸쳐서 놓여 있다. 금관조복을 입고 있는 문인석의 꾹 다문 입술과 커다란 눈을 내리깔고 있는 모습은 보는 이를 웃음 짓게 한다. 이 문인석은 위쪽에 위치한 부모의 묘소에 있는 문인석과 비슷한 양식인데 사망 직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유형원의 본관은 문화, 자는 덕부(德夫), 호는 반계(磻溪)이다. 서울 정릉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흠(欽)은 그가 두 살 때인 1623년에 일어난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 복위를 도모했다는 유몽인의 옥사에 연루되어 28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조부모와 함께 살게 된 유형원은 다섯 살 때부터 외숙부 이원진과 고모부 김세렴에게 글을 배웠다. 여덟 살에 사서삼경의 대의를 깨쳤으며, 열 살 때 경전 이외의 제자백가까지 섭렵하여 대강의 요지를 알았다고 한다. 이원진과 김세렴은 어린 조카와 토론하다가 “옛날에도 이런 사람이 있었을까?”라며 감탄했을 정도로 총명했다. 유형원은 열세 살 때 성현을 사모하며 뜻을 오로지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쓰기로 결심하고 평생을 실천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15세의 소년은 조부모와 어머니, 두 분의 고모를 모시고 원주로 피난을 갔다. 전쟁이 끝난 후 조부모는 부안으로 내려가고, 자신은 어머니와 서울로 되돌아왔다. 이때부터 조부를 찾아뵙기 위해 부안을 자주 드나들었다. 1642년(21세)에 자신을 경계하는 ‘사잠(四箴)’을 지었고, 서울을 떠나 경기도 지평(현 양주)에서 살다가 이듬해에는 여주로 거처를 옮겼다. 이해 고모부의 사위인 이가우(숙종대의 학자 이서우의 형)와 산천을 답사하고 한 달 넘겨 집에 돌아왔다. 이 무렵부터 거의 해마다 팔도를 여행했다. 도보 여행은 물론 한강을 따라 뱃길로 경기도와 충청도를 거쳐 강원도와 경기도까지 여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기행일기>, <여지지>, <지리군서>를 편찬했다.
■우반동에서 꿈이 영글다
32세가 되던 1653년에 전북 부안 우반동으로 이사했다. 그의 호 반계는 그 동네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이곳에 반계서당을 짓고 부강한 조선을 만들기 위해 궁리하고, 제자를 기르면서 49세까지 <반계수록>을 저술했다. 이 책의 핵심은 토지제도의 개혁이다.
“왕도 정치는 백성의 재산을 조절하는데 있고, 백성의 재산을 조절하는 것은 토지의 경계를 바르게 하는데 있다. 후세에 왕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은 모두 토지제도가 무너진 데서 말미암은 것이었고, 마침내는 오랑캐가 나라를 어지럽혀서 백성이 도탄에 빠지는데 이르게 되었다.”
유형원이 추구한 학문의 자세와 목적은 ‘실사구시(實事求是)’ 네 글자였다. 순암 안정복이 정리한 연보에는 이런 기사가 나온다. “마음에 묘하게 부합되는 것이 있으면 밤중에라도 일어나 그것을 기록하였다.”
유형원은 우리나라의 지세에 유의하여 산천을 두루 살피고 도로의 원근과 관방의 지세를 파악하여 기록했다. 집에 있을 때도 공부에 지치면 집안이나 마을의 아이들을 데리고 산에 오르거나 바닷가를 산책하는 일을 낙으로 삼았다. 여행을 하면서 이름난 선비를 만나 학문을 논하는 특별한 즐거움도 누렸다. 단학수련의 대가로 알려진 청하 권극중(1585~1659)이나 미수 허목(1595~1682) 같은 선배학자를 찾아뵙고 배움을 청했다. 학문으로 주위에 이름이 알려져 44살이 되던 해에 재상이 자신을 천거하자 정중히 사양했다. “내가 지금 재상을 모르는데, 지금 재상이 나를 어떻게 알겠는가?”라는 것이 거절한 이유였다.
유형원이 북벌에 뜻을 두었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실천한 북벌은 매우 구체적이다. 연보에 따르면, 우반동에 살면서 자신이 구상한대로 큰 배 다섯 척을 만들어 집 앞 바다에 띄워 성능을 시험하고, 스스로 준마를 길러 말 타기를 익혔으며, 좋은 활과 조총 수십 자루를 구하여 마을 주민과 종들에게 사격을 가르쳤다. 이 때문에 우반동의 포수가 국내에서 사격 잘하기로 소문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이처럼 무예를 가르쳤을 뿐 아니라 <기효신서절요>, <무경초> 같은 병서를 편찬했다. 또한 중국말을 배워 제주도에 표류했다가 서울에 온 한인들을 만나 중국의 사정을 알아보기도 했다.
유형원은 필생의 저서 <반계수록>을 통해 나라의 제도 전반을 개편하려는 열망을 품었다. 토지를 균등하게 배분할 수 있도록 전제의 개편을 비롯하여 세제와 녹봉제의 확립, 과거의 폐지와 천거제의 실시, 천인신분의 세습제 폐지와 기회균등의 구현, 관제와 학제의 전면 개편 같은 개혁 방안을 조목조목 제시하고 꼼꼼하게 대안을 제시했다.
민생문제의 기본적 해결이 소수가 독점한 사유 토지를 국가가 전부 몰수하여 다시 합리적으로 분배함에 있다는 주장이 개혁의 핵심이다. 토지는 사방 100보를 1묘(畝), 100묘를 1경(頃=약 5,000평)으로 4경을 1전(佃)으로 하여 1전 내에 농민 네 명이 각각 1경씩 경작하고 조세를 바치며(소출의 15분의 1) 1전에서 병사 1명을 내되 농민 네 명 중에 가장 건장한 자가 병역에 복무하는 병농합일의 체제를 실행할 것을 주장했다. 소문을 타고 <반계수록> 필사본이 팔도로 퍼져나갔다. 책을 읽고 반계의 주장에 동의하는 학자와 정치가들이 여럿 나타났다. 이런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1770년 영조의 명으로 <반계수록> 26권이 간행될 수 있었다.
유형원이 힘써 주장한 토지공유제와 경자유전의 사상은 실학파의 사상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탐관오리와 지주들의 횡포에 시달렸던 농민들의 열망과 의지 때문이다. 갑오동학농민혁명은 이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지금, 오늘, 여기
이제까지 살펴보았듯이 유형원은 개혁의 핵심을 토지의 고른 분배에서 찾았다. 여기서 우리의 현실은 어떤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2018년 대한민국의 현실은 반계가 살았던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형편이 좋아졌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반계가 평생을 걸고 개혁하려 했던 독점의 문제가 더욱 강화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국가와 사회가 서둘러야 할 일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일이며, 장래의 주인인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심는 정책을 제도화하는 것이다. 그 일의 시작은 독점을 해체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물결을 만들어내는데 학자들도 이제는 목소리를 내야 하지 않을까. 오늘 우리가 반계선생의 사상을 살피는 까닭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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