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는 인천] 박자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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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새해의 문을 열 때면 지구 반대편에서 불과 몇 시간의 시차를 두고 중계되는 신년음악회를 비교적 음향이 좋은 영화관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즐기곤 했다. 해마다 연말연시에는 회식도 많고 수술도 많아, 피곤하고 어깨도 뻐근한데, 모처럼 심신을 휴식하는 시간이 됐다.

올해는 베를린 필하모니의 신년음악회를 평소처럼 세 자리 예약했는데, 어머니가 지난주에 부정맥으로 입원해, 음악회까지 동반할 형편이 안되어 아내와 둘이서만 가게 됐다.

베를린 시립교향악단(Staatskapelle Berlin)의 종신 지휘자인 아르헨티나 출신 다니엘 바렌보임(1942~)이 모차르트의 “대관식”을 관현악단을 지휘하며 직접 피아노로 연주했다. 이후 라벨(Ravel, 1875~1937)의 <스페인 랩소디>, <어릿광대의 아침 노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지휘했다. <스페인 랩소디>에서 “캐스터네츠”가 플라밍고 무용수를 떠올리게 했다.

80세를 바라보는 노지휘자가 다부진 체격으로 두 시간 가까이 지휘하다 보니 힘이 퍽 들겠다는 생각이 들 즈음에 마지막 곡 <볼레로>가 연주되었다.

조용하게 울리는 스네어 드럼으로 리듬이 속삭이듯 곡이 시작됐다. 바로 노래조의 가락을 플루트가 연주하고, 클라리넷이 받아서 되풀이했다. 이 가락은 목관 악기로 넘어가고, 다른 악기들이 추가되어 점점 연주되는 악기들이 많아졌다. 속도가 빨라지고 음색이 커지도록 악기들이 추가되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스네어 드럼이 함께했다.

특이한 점은 지휘자가 곡의 시작부분에서만 지휘하더니 곧 지휘봉을 겨드랑이에 낀 채로 줄곧 서 있기만 했다. 드럼이 일정한 속도로 리듬을 맞춰 주고 있으니 그는 안심하고 연주되는 악기들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다양한 음색의 악기들이 크레센도를 이뤄 마지막 클라이맥스를 이룰 때서야 그는 다시 지휘봉을 손에 들어 마무리했다.

마지막 앙코르곡으로 비제의 “카르멘”의 서곡을 듣고 돌아오면서, <볼레로>에서 지휘자 대신 리듬을 이끌어간 타악기, ‘스네어 드럼’에 대해 생각해 봤다. 고등학교시절 교련사열 때 밴드부 지휘자 바로 뒤에 따라오는 고적대의 ‘작은북’들이 지휘자는 보지 못한 채 행진하는 우리가 “왼발, 왼발”을 맞추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기억이 났다. 리듬의 중요성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오늘도 힘든 수술을 몇 개 마쳤더니 오른쪽 어깨가 거북하다. 수석전공의와 인턴, 스크럽 간호사가 도와주지만 최종 결정은 내가 해야 하고, 책임도 내가 져야 한다. 디자인과 절개부터 모든 중요한 수술의 과정은 다 내가 담당해야 한다. 쉰다고 하면 절개 부위를 봉합하는 것 정도만 전공의에게 훈련시키고 나는 뒤에 앉아 지켜보며 숨을 돌리는 정도일까. 그때도 귀 기울여 듣는 것은 마취기 위에 있는 심전도기기에서 ‘삑, 삑’하는 심전도 소리이다.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리면 자동으로 마취의사에게 “환자 괜찮습니까?”하고 묻는 말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유명한 지휘자나 연주자는 자신의 맥박수로 계산하여 곡의 빠르기를 조절한다고 들었다. 외과의사인 내게 환자의 심전도 소리가 ‘메트로놈’ 역할을 한다. 부디 내가 나이가 들어도 박자의 감각을 잃지 않게 되길 소망한다.

황건 인하대 의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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