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운동 11명 중 道 출신 유일
사료 부족 “업적 재조명” 목소리
“일제 심장부서 2ㆍ8 독립선언을 외친 유학생 운동가 ‘상산(常山) 김도연’을 아시나요?”
100년 전 2월8일 일본 도쿄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이 목숨을 걸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당시 실행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던 11명의 학생 운동가 중 김도연 선생(1894~1967)은 유일한 경기도 출신이다.
김포 양동면 태생 김 선생은 1919년 독립선언서 등사, 민족대회 소집 청원서, 결의문 등을 작성하며 2ㆍ8 독립선언을 주도했다. 이후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현 재일본한국YMCA)에서 결의문을 낭독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재판에 넘겨져 출판법 위반 등 혐의로 9개월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시간이 흘러 1942년, 김 선생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생애 두 번째 붙잡혀 징역 2년을 받았다. 해방 후 그는 대한민국 초대 재무부장관을 지내며 정계에 머물렀다.
김도연 선생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이것이 전부다. 특히 경기도 내 어디에서도 김 선생의 위상이 돋보이는 곳은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다.
2ㆍ8 독립선언 100주년을 하루 앞둔 7일 그의 고향 김포에 있는 독립운동기념관을 찾았다.
전시관 내 3ㆍ1운동을 이끈 의병, 독립군 등 50여 명의 독립운동가가 소개된 사이에서 김도연 선생에 대한 설명은 ‘1919년 일본에서 비밀리에 조선독립청년당을 조직하고 독립선언을 주도했던 김도연 선생을 비롯해…(중략)’가 끝이다.
김 선생의 묘와 기념공원도 경기도가 아닌 서울에 있는 것으로 추정됨에 따라 지역 위인의 업적을 지역에서 재조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김도연 선생의 사료가 부족한 이유에 대해 역사전문가들은 “극적인 요소가 다른 위인들보다 낮아서”라고 설명했다. 여느 독립운동가처럼 가난하고 외로운 삶을 살지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獄死)하지도, 대한민국 독립을 못 본 채 생을 마감하지도 않았다는 이유다.
김포지역 한 문화관광해설사는 “김도연 선생은 다른 독립운동가에 비해 ‘무난하다’는 인식이 있어 자료 발굴이 적극적이지 못했던 것 같다”며 “김포에 김도연 선생이 있듯, 지역마다 감춰진 위인이 존재할 것이다. 이들의 역할을 알리고 미래 세대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 지역이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3.1운동기념사업회 관계자는 “전국 각지에서 3ㆍ1운동의 도화선이 된 2ㆍ8 독립운동 기념행사를 열지만 이 과정에서 소외된 위인들이 없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며 “독립운동가의 위상 강화를 위해 지역민도 큰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양형찬ㆍ이연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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