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 선수촌에 스크린 도어?

그리스의 아테네를 여행하다 보면 재미있는 조각상 하나를 보게 된다.

파나티나이코 육상 경기장에 서있는 돌 하나에 두 얼굴이 세겨 진 것.

아테네의 수호신 아테네를 기리기 위해 축제 경기를 개최한 곳인데, 돌 한면의 노인은 성기가 발기돼 있고 다른 한 면의 젊은이 성기는 그렇지 못하여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니까 이 조각상의 뜻은 운동을 하면 노인이라도 육체적으로 젊어 지고, 젊은이라 해도 운동을 안 하면 육체가 노인처럼 된다는 것이다.

과연 올림픽 발상 국가다운 메시지다.

고대 그리스는 이처럼 스포츠가 국가의 절대적인 지표가 되었다.

다른 점은 아테네가 육체와 문화, 예술 등 정신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스포츠가 발달되었다면 스파르타는 군사적으로 강한 국민을 육성하기 위해 투창, 원반 던지기, 달리기 등의 스포츠가 동원되었다.

심지어 스파르타는 아기를 낳았을 때 검사를 하여 신체적 결함이 있으면 스파르타 시민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여 죽이기까지 했다.

7세가 되면 집을 떠나 20세까지 아고게(Agoge)라는 조직에 들어가 강한 시민으로서의 훈련을 받아야 했는데 아무 때나 싸움터에 뛰어들 명예롭고 용감한 전사로 육성하는 것이다.

아테네의 스파르타의 대조적인 스포츠정신이지만 공통점도 있었다.

경기 때는 옷을 입지 않고 맨 몸으론 한다는 것과 교육과정에는 몸이 부서질 정도의 강훈련이 주를 이루지만 음악과 시를 즐기는 것도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중요하다.

이와 같은 그리스를 정복한 로마는 그대로 그들 문화를 수용하면서도 스포츠를 로마 시민들의 볼거리로 탈바꿈시켰다. 대형 경기장을 만들어 매일 같이 시민들에게 정치싸움보다 경기에 열광케 하는 ‘마약’과 같은 역할을 하게 한 것이다. 시민들을 열광시키기 위해 검투사가 등장하고 영화 ‘벤허’에서처럼 네 마리의 말이 하나가 되어 긴박하게 달리는 전차 경기도 서슴치 않는다. 심지어 사자 같은 맹수를 풀어 놓아 관중들을 전율과 흥분속으로 몰아 넣었다.

이와 같은 그리스와 로마의 다양한 형태의 스포츠는 올림픽의 탄생과 함께 전세계적으로 보편화 되고 정화되어 왔다.

그러나 ‘기록’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스포츠 ‘신앙’이 등장하고, 승리가 곧 돈으로 연결되는 상업주의가 등장하면서 많은 역기능을 일으키고 있다.

기록을 위해, 돈을 위해, 병역 면제를 위해 옷을 벗고 운동경기를 하던 아테네의 그 순수했던 스포츠는 사라지고 선수촌에서 스파르타식 도제식 훈련을 강행하고 로마식 폭력까지도 불사하는 것이다.

급기야 성폭력이 꼬리를 무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이것이 진정 우리가 바라는 스포츠의 모델일까?

스포츠계의 미투 운동을 보는 국민의 눈은 참으로 착잡하다.

쇼트 트랙 국가대표 심석희 선수에 대한 조재범 코치의 상습적 성폭행인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는 가운데 지난달 30일에는 남자 기계체조 국가대표 선수 한 사람임 선수촌 불미한 사건으로 퇴촌 명령을 받은 것으로 보도 되었다. 눈앞에 동료선수들이 미투 운동으로 비틀거리는 걸 보면서도 자기 멋대로 놀아난 것이니 참으론 한심할 뿐이다.

이것이 소위 성적지상주의, 엘리트체육이 가져온 결과다.

어떤 사람은 선수촌에 스크린도어를 설치하자는 제안을 했다가 지나친 인권침해라는 반대에 부딛혔다는 보도도 있다. 어쩌다 우리 스포츠가 이렇게까지 되었는가? 이제 우리 스포츠가 거듭나지 않고는 선수촌과 경기장에 어떤 첨단 보안기를 설치해도 그건 허수아비에 불과할 것이다. 스포츠가 한 사람의 세계 기록이나 챔피언 보다 국민 모두의 건강과 건전한 정신의 중심으로 돌아와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변평섭 칼럼니스트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