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독립운동 역량 결집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어머니
엄항섭 선생의 부인으로 女청년동맹 활동
윤봉길 도시락 폭탄 보자기 손수 만들어
독립운동가들 부상 살피고 반일의식 고취
세계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지난 1975년 UN이 지정한 ‘세계 여성의 날’이 다가온 가운데, 한 명의 독립운동가이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어머니로 불렸던 여주 출신 ‘연미당(延薇堂ㆍ1908~1981)’ 애국지사가 조명을 받고 있다.
연미당 선생은 한반도가 빛을 잃었던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독립운동 등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자주적 여성’의 모습을 보이며 전통적 유교사상에서의 여성상을 초월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여주 본적의 연미당 선생은 백범 김구 선생의 최측근이었던 엄항섭 선생의 부인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내부에서 단단히 지탱하며 독립의 토대를 만든 여성독립운동가다.
연 선생은 1908년 출생 이후 만 19세의 나이인 1927년 3월 엄항섭과 결혼했다. 당시 엄항섭은 1919년 3ㆍ1운동에 참여한 바 있는 독립운동가였다. 이후 연 선생은 엄항섭을 따라 중국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1931년에는 일제의 무력침략으로 발발한 만주사변 이후 상해 내 여러 한인단체 대표자회의에서 ‘여자청년동맹 대표’로 참석해 반일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듬해인 1932년 4월에는 일본 육군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 등 한반도 침략의 원흉들을 제거하고자 결심한 윤봉길 의사를 위해 연 선생은 도시락 폭탄을 감쌀 보자기를 손수 만들어주기도 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義擧) 후에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1936년 5월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을 수행하며 함께 피난했다. 이 기간에 백범 김구 선생이 저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을 때 지극한 정성으로 간호하고 부상당한 독립운동가를 보살피는 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어머니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1938년 10월에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원으로, 1943년 2월에는 한국애국부인회 조직부장으로서 반일의식을 고취하는 선전과 홍보활동에 주력했다.
연 선생은 1945년 8월15일 미국으로부터 두 차례의 원자폭탄 투하를 받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조국이 광복된 뒤 1946년 6월 인천항을 통해 한반도로 환국, 1981년 1월1일 7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정부는 연미당 애국지사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연미당 선생뿐 아니라 여러 여성독립운동가 조명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채태병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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