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1운동 100주년의 해이다. 그해 4월11일 상해에서 탄생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헌장(憲章)과 조각(組閣)으로 조직된 기억의 실체였으며 오늘날 대한민국은 그해에 남겨진 그 기억의 터 위에 세워졌다.
그런데 “3ㆍ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 했다는 헌법 전문을 애써 부정하면서 새로운 전통을 만들려는 사람들은 어떤 인격의 소유자들일까?
심지어 을사오적이었던 이완용은 이 운동을 가리켜 “삶 중에 죽음을 구하는” ‘허설(虛說)’과 ‘망동(妄動)’이라 치부하였고, 민족대표자 서명을 거부했던 윤치호는 “순진한 젊은이들이 애국심이라는 미명하에 불을 보듯 뻔한 위험 속으로 달려드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같은 시대 같은 삶의 상황에서 살았던 각기 다른 인격의 모습들이다.
인격은 타고나지만 교육과 학습을 통해 개발된다. 사람은 저마다의 판단대로 옳은 듯이 살아가지만 나 외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수시로 평가되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을 매개로 나 자신을 인식한다”고 했던 사르트르의 말처럼 사람은 제멋대로 살기에는 한계가 있다. 언제나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을 살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을 당한다”고 했던 옛 로마 사람들의 인식은 틀린 말은 아니겠다.
그럼에도 자기만 옳다하고, 다수의 의지와 판단과 결정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대책 없이 정제되지 못한 선동적인 발언을 하고, 가짜 뉴스를 퍼뜨리면서 공공성(公共性)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어떤 인격의 소유자들일까? 타고난 원죄의 본성 때문에 주위를 살펴볼 겨를도 없이 앞만 바라보고 돌진하는 괴물성의 발현은 아닐까?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나는 내가 하는 일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롬 7:15)고 한 것은 이런 악행을 일삼는 인격을 두고 한 탄식이 아닐까?
사회가 공공성을 담보로 형성하고 경영되는 인격의 집합체라고 할 때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구분하고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은 그 공적 사회에 동의하고 동참하는 개인으로서 인격의 몫이다. 그러므로 사회가 평안하기를 원한다면 지독한 비민주적 독재가 행해지지 않는 한 신뢰하며 지켜보고 기다릴 줄 아는 것도 인격의 역할이라 하겠다.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폴 투르니에는 “인생이란 서로 숨은 척하는 숨바꼭질이라 하더라도 나는 인격적인 접촉을 촉구하기를 그만두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포기할 수도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되는 인격에 대한 무한한 신뢰의 표현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나친 감정은 인격을 상하게 하고 그가 속한 사회를 멍들게 할 수 있지만, 신뢰를 동반한 감정은 인격을 성숙하게 하고 그가 속한 사회를 치료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물론 100% 만족할 수는 없겠지만 공적으로 밝혀지고 결정된 사실을 아니라 하고, 터무니없는 거짓을 조작하면서까지 사실인 것처럼 호도하려고 해서는 절대로 안 되겠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다가 보호받아야 할 그 인격이 버려질 쓰레기처럼 취급될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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