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주의로부터 강탈 당한 조국의 빛을 되찾고자 1919년 4월11일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뒤 100년이 흘렀다. 당시 임시정부가 공표한 ‘대한민국임시헌장(大韓民國臨時憲章)’ 헌법을 토대로 현재의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탄생하는 등 한반도 역사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거대한 한 축을 맡고 있다.
이처럼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확정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경기도, 특히 수원지역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이 재조명을 받고 있다. 수원의 민족정신을 수호했던 김세환, 수원의 유관순으로 불린 이선경, 청년 비밀결사 구국민단의 선봉에 섰던 박선태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에 본보는 역사적인 100주년을 기념하고자 조국의 광복을 위해 희생ㆍ헌신했던 선조들의 애국정신을 계승하고,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수원지역의 대표적 독립운동가 9인을 소개한다.
채태병기자 / 사진= 수원박물관 제공
김세환 (1888~1945)
민족대표 48인 중 한 명… 신간회 운동 앞장
수원면 남수리에서 태어난 김세환은 3ㆍ1운동의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으로 일제강점기 수원지역을 대표하는 교육가이자 민족운동가였다. 한성관립외국어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주오 대학에서 공부한 그는 귀국 후 수원상업강습소와 삼일여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1919년 3ㆍ1운동 당시 민족대표 48인 중 한 명으로서 수원지역의 3ㆍ1운동을 독려하고, 같은 해 3월13일 서울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돼 약 1년간 옥고를 치렀다.
3ㆍ1운동 이후에는 조선기독교 창문사 설립에 적극 관여했고 민립대학설립운동과 신간회 운동에 앞장섰다. 1920년대 후반에는 수원체육회를 중심으로 수원청년회 계통의 사회주의세력과 경쟁하며, 민족진영의 발전을 도모했다. 1939년 11월에는 수원 출신의 부호 최상희를 설득, 삼일학교에 2만 원을 기부하게 해 삼일학교를 폐교의 위기에서 구해내기도 했다. 수원 삼일학교는 당시 무상아동 교육기관이었으며 1940년에는 26회 졸업생 500명을 배출했다. 1941년 3월에는 수원지역 3대 지주의 한 명이었던 홍사훈을 도와 수원상업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에 힘썼다.
김장성 (1913~1932)
청년조직서 활동하며 민족적 대중투쟁 선도
김장성은 수원면 산투리에서 태어나 수원지역의 청년운동과 사회주의운동에 활발히 참여했다. 그는 1930년 10월 화성학원의 운동회가 개최돼 많은 사람이 모일 것으로 예상, 민족적 대중투쟁을 선도하는 격문을 살포하며 독립운동 의지를 불태우다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1929년 수원지역에는 수원청년동맹, 수원소년동맹 등의 청년조직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는데 1930년 여름에 접어들면서 전국 곳곳에서 독립운동 관련 격문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일제 경찰은 수원지역의 청년조직에 대한 감시와 수색을 더욱 치밀하게 전개했다.
그러나 일제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당시 18살이었던 김장성은 동갑내기 친구 홍종근과 자주 만나 수원에서도 격문을 통해 일제의 식민지배에 저항하고, 시민들의 계급의식을 고취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두 소년은 1930년 10월 총 16장의 격문을 작성해 수원지역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직접 격문을 부착했다. 같은 해 11월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된 김장성은 서대문형무소로 수감된 채 재판을 받아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는 수감 중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병을 얻었고, 형기 12일을 앞두고 건강상태 악화로 임시출옥했으나 1932년 3월9일 20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김향화 (1897~미상)
기생 30여명 이끌고 만세운동… 일제에 항거
수원면 남수리에 있던 ‘수원예기조합’ 소속 기생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김향화는 경성에서 태어나 자란 뒤 수원으로 내려와 기생이 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향화는 노래뿐 아니라 검무, 승무, 서양악기 등에도 능통해 수원기생의 으뜸으로 불렸다.
김향화를 비롯한 수원의 기생들은 1919년 3월29일 자혜의원(현 화성행궁 봉수당) 앞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들은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민족의 의거를 보여주고자 항거했다. 김향화 등 30명의 기생은 만세운동 중 일제에 의해 체포됐다. 당시 수원예기조합의 맏언니이자 만세운동을 주도한 김향화는 모진 고문과 재판을 받아 서대문형무소에 6개월 동안 수감됐다. 당시 서대문형무소에 있던 유관순 열사와 같은 감방에 수용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처럼 대한독립을 열망했던 수원 기생들의 이야기는 ‘조선미인보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관련 자료에 따르면 수원예기조합 소속 기생들은 1919년 1월 고종 황제가 서거했을 때 망곡제를 거행, 기차를 타고 경성에 올라가 대한문 앞에서 곡을 하기도 했다. 또 1926년 순종 황제가 서거했을 때도 봉도단을 조직, 서울로 상경해 애도하기도 했다.
박선태 (1901~1938)
3ㆍ1운동과 학생 비밀결사 주도… 군자금 지원
수원면 산루리에서 태어난 박선태는 수원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로 진학했다. 3ㆍ1운동 당시 박선태는 김세환, 김노적 등과 함께 수원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수원의 비밀결사 조직인 구국민단의 단장으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일제 경찰에게 체포돼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투옥됐다.
1920년대 중반 석방된 박선태는 중국으로 망명해 학업에 힘쓰는 한편 독립운동에도 은밀히 참여했다. 귀국 후에는 생계를 위해 인쇄 및 상업에 종사하는 가운데 일제의 눈을 피해 수원청년회, 수원체육회, 수원기자동맹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인쇄소와 상회에서 얻은 수익을 군자금 지원 등에 사용하던 그는 1930년 일제 경찰에 의해 또다시 체포됐다. 군자금 마련 및 유인물 배포 혐의로 투옥된 박선태는 3년간 수감생활을 하다 고문 후유증 탓에 순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선태는 수원지역 대표적인 지성인으로 1910년부터 1920년대까지 학생 등 젊은 층을 대표해 3ㆍ1운동과 학생 비밀결사를 주도했고,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까지는 민족주의세력의 중요한 한 축으로서 활동한 민족운동가로 평가받는다.
임면수 (1874~1930)
만주 서간도서 독립군 양성… 무장활동 펼쳐
수원지역 대표적인 근대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임면수는 일제강점기 당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현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삼일학교의 설립자 중 1명이며 여성교육을 위해 과수원을 현 매향정보중고등학교 부지로 기부하기도 했다.
상동청년학원에서 활동하던 그는 1910년 일본에 의해 조선이 강점되자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1911년 2월 만주 서간도 환인현 횡도천으로 망명, 그곳에 개교한 양성중학교 교장으로서 독립군 양성에 기여했다. 1910년대 중반에는 부민단의 결사대에서 활동했으며, 3ㆍ1운동 이후 일본의 간도 출병으로 통화현에서 해룡현으로 근거지를 옮겨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일제 경찰에 체포됐다.
임면수는 1920년 6월 해룡현 북산정자 삼도가에 거주하는 일본 경찰 및 친일 조선인 등을 암살하기도 하는 등 무장활동도 펼친 바 있다. 아울러 군자금 마련을 위해 아편 등의 밀수입도 진행한 것으로 전해진다.
1921년 2월 중국 길림시 내 잠입활동 중 밀정의 고발로 체포된 임면수는 평양감옥에 압송돼 모진 고문과 매로 전신이 마비된 후에야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결국 그는 1930년 11월 56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이선경 (1902~1921)
비밀결사 구국민단서 활약… 수원의 유관순
수원면 산투리에서 태어나 수원공립보통학교(현 신풍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숙명여학교로 유학을 간 이선경은 1919년 당시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서울의 만세운동은 숙명여학교, 이화학당, 진명여학교 등 여학생의 주도로 진행된 사례가 많았다.
이선경은 1919년 3월5일 만세운동을 벌이다 현장에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됐다.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한 인원수가 너무 많아, 이들을 모두 감금할 수 없었던 일제는 같은 해 3월20일 이선경 등 학생 일부를 무죄 방면했다.
이후 숙명여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한 이선경은 1920년 8월15일 구국민단 사건으로 일제에 체포되면서 약 22일간 학교를 결석, 결국 학교규칙에 따라 퇴학을 당했다. 구국민단은 1920년 6월 박선태를 단장으로 한 서울 유학생 중심의 비밀결사로, 수원 최초의 비밀결사 조직이자 학생들이 중심이 됐다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의미가 있는 조직이다.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활동을 하던 구국민단은 1920년 8월부터 단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면서 표면 위로 드러났다. 이선경은 서울에서 체포돼 수원경찰서로 이송됐다. 이선경은 구류 8개월 만에 석방됐으나 모진 고문을 당한 탓에 19살 꽃다운 나이로 순국했다.
이하영 (1872~1952)
기독교 민족운동가… 대한제국기 삼일학교 설립
이하영은 근대 수원의 대표적 민족운동가로 대한제국기에는 삼일학교를 설립하고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3ㆍ1운동을 주도해 옥고를 치른 기독교인이다. 수원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을 견인한 수원종로교회에서도 활동했다.
1919년 3ㆍ1운동 당시 그는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만세운동을 주도,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당시 이하영은 진남포에서 이승훈, 임치정 등과 500여 명의 군중을 모아 만세운동을 진행했다.
해방 이후에는 수원군인민위원회에서 활동했다. 뒤늦게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지난 2008년에서야 건국포장이 추서된 그는 김세환ㆍ임면수와 함께 수원을 대표하는 기독교 민족운동가였지만, 관련 자료 등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 공적 기록은 정부의 ‘독립유공자공훈록’ 내용이 전부다.
이하영은 지난 1907년 한국 최초의 간호사 이그레이스(1882~미상)와 결혼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전도사였던 그는 결혼 후에도 부인의 간호학 학업과 간호원 근무를 계속할 수 있도록 약속하는 등 시대적 관습을 타파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조안득 (1910~미상)
의열투쟁 앞장… 우가키 총독 암살하려다 체포
수원면 매산리에서 태어난 조안득은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본격화되던 1935년 우가키 총독을 암살하고자 사전에 폭탄을 제조하고, 처단 예행연습을 하다 체포돼 옥고를 치른 인물이다.
1920년대 후반부터 일본은 식민지 조선을 병참기지로 만드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물적 자원뿐 아니라 인적 자원도 활용하고자 이념을 변화시킬 민족말살정책을 시행했다. 이런 조선총독부의 정책은 수원지역에도 큰 고통을 주었다. 1905년 경부선 개통과 함께 수원역이 설치되고, 수원역 주변으로 수원군청, 경찰서, 재판소, 헌병분대 등이 조성됐다. 일본의 주도로 새로운 시가지가 형성되자 일본인들이 이주, 수원지역의 경제 권력을 장악했다.
이에 수원노동조합에 가입해 사회운동과 민족운동에 관계하던 조안득은 의열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자고 주장했다. 조안득은 경제적 어려움을 일제의 민족차별과 제국주의적 지배정책에 기인한 것이라 판단, 무장행동을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총 5차례나 우가키 총독을 암살하고자 계획을 세웠으나 폭발물의 불발, 일제 경찰의 삼엄한 감시 등의 이유로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조안득은 1936년 12월 총독 암살 시도 혐의로 일제 경찰에 체포됐다.
홍종철 (1920~1989)
‘수원예술호연구락부’ 결성해 독립운동 전개
조선인을 위한 대표적 공연장인 우미관이 있는 곳으로 유명한 서울 경성부 관철정에서 태어난 홍종철은 1929년 수원면 남창리로 이사를 오면서 신풍공립보통학교로 전학을 오게 됐다. 1939년 10월 홍종철은 사회주의 청년 최용법, 차준석, 김길준 등과 ‘수원예술호연구락부’를 결성했다. 수원예술호연구락부는 겉으로는 예술을 연구하는 조직이었지만, 실제는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구성된 조직이었다.
홍종철과 수원예술호연구락부 동지들은 일본의 굴레에서 조선을 독립시키고자 여러 방안을 논의했다. 그들이 처음 제기한 방안은 해외의 무장투쟁 세력과 결합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들은 만주로 넘어가고자 여권 및 여비 마련을 위해 농작물 종자와 농기구를 파는 등의 노력도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중단됐다.
수원예술호연구락부는 포기하지 않고 일본의 정세를 염탐하고 중국 만주지역의 무장투쟁 세력과 접촉하고자 일부 동지를 파견하는 계획을 세우고자 했으나 이 과정에서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됐다. 1941년 체포돼 징역 2년을 선고받은 홍종철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해방 이후 생계에 어려움을 겪었던 홍종철은 작은 단칸방에서 가족들과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다 1989년 7월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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