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맞서 당당히 독립외길… 해방후 ‘미완의 남북연합’
“나의 고향은 양주다. 나는 풍광이 맑고 아름다운 이 양주땅에서 소년시대를 순전히 조부의 사상적 감화를 받으며 자라났다. …그 분의 사상은 ‘중국을 치자’함이다. …이리하여 나는 조부의 감화로 이 산골구석에 묻혀 있을 때가 아니란 자각을 얻고…” <삼천리> 1933년 9월호에 실린 여운형의 자서전 첫머리 부분이다. 1886년 양평군 신원리에서 태어난 몽양 여운형은 1900년 집안 어른 여병현의 권유로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영어와 물리 같은 신학문을 배웠다. 배재학당 학생들이 조직한 협성회에 가입하여 배운 토론과 웅변은 평생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1903년 어머니와 할아버지의 별세로 다니던 우체학교를 중퇴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지냈다. 2년 뒤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농사를 짓고 책을 읽으며 지내던 그는 선교사의 지원을 받아 기독교 학교인 광동학교를 고향에 설립하고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했다. 1908년, 삼년상을 마친 23세의 여운형은 신주단지를 땅에 묻고 집안의 노비를 해방한 후 강릉 초당의숙의 교사로 부임하여 청년계몽교육에 전념했다. 그러나 1911년, 일본 연호 사용을 거부하여 경찰의 퇴거명령을 받고 서울로 돌아왔다. 여운형은 클라크 목사의 권유로 1912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 동안 신학을 공부했다. 105인 사건을 지켜보고 중국 신해혁명 소식을 들은 여운형은 중국 유학을 결정하고 1914년 중국 남경의 금릉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 만세운동을 기획하다
1917년 봄 대학을 수료한 여운형은 영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상해 협화서국의 직원으로 일했다. 한인 청년들의 구미 유학과 도항을 주선하다가 만난 신규식과는 한평생 동지이자 벗으로 지냈다. 여름에 귀국해 가족을 중국으로 망명시켰다. 이 해 중국 신문기자의 소개로 혁명가 손문을 만났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으로 치닫던 1918년 8월 이강훈, 이상재 등을 만나 국제 정세와 전후 처리 문제 등을 논의하고, 11월 하순에 장덕수, 조동호, 선우혁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했다. 여운형은 윌슨대통령 특사로 중국을 방문한 크레인을 면담하고 윌슨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를 전달하고, 상해에 있는 신문사에도 전달했다.
“우리 한국인은 결코 일본에게 정복된 것이 아니요, 일본의 교활과 기만에 빠진 것뿐이니 이 기만과 제국주의는 장차 전 아시아를 침범하여 대통령 월슨 씨의 평화주의 민주주의를 정복하려 함으로 한국은 반드시 독립을 회복해야 하며 민주주의가 반드시 아시아에 정착돼야 합니다” -월슨에게 보낸 여운형의 편지 일부-
1919년 1월 신한청년당은 천진에 있던 김규식을 상해로 불러들여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결정하고 2월 초 파리로 파견했다. 이어 선우혁 등을 국내로 잠입시켰고, 장덕수와 여운홍은 일본을 거쳐 다시 국내로, 여운형 자신은 간도와 시베리아로 들어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한 사실을 알리고 조선 독립에 관한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킬 전민족의 궐기를 촉구했다. 여운형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동녕, 박은식 등과 만나 독립운동 방안을 논의하고 상해로 돌아왔다. 2월 1일 길림성에서 대한독립선언이 선포되고, 2월 8일에는 일본 동경에서 2ㆍ8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1919년 4월, 여운형은 3ㆍ1운동으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무차장ㆍ외무위원장으로 추대됐다. 상해교민단 단장으로 활동하며 거류민을 국민군으로 편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교민의 아동을 교육하기 위해 인성학교를 설립했다. 일본 정부가 31운동을 기획한 여운형을 일본으로 초청했다. 1919년 11월 18일부터 12월 1일까지 일본정부의 초청으로 3주 동안 일본 도쿄를 방문하여 육군상, 총독부 정무총감, 수상 등 최고 요인들과 회담했다. 이 자리에서 여운형은 일본의 위협과 자치제 제안을 공박하고 즉시 독립을 주창해 충격을 주었다. 제국호텔에서 가진 기자회견은 일본 사회 전반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여운형은 기자들 앞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이 세계의 대세이자 신의 뜻이며 한민족의 각성이며, 한국의 독립이 한국의 생존권이자 인간 자연의 원리”라고 강조했다. 일제는 여운형을 일제에 귀순시키거나 자치론 동조자로 만들려 계획했으나 이를 뒤집었던 것이다. 여운형의 거침없는 발언과 당당한 행동은 이를 계획했던 하라 내각이 해산될 정도로 일본 정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 광복을 위해 좌우를 아우르다
1920년 봄, 여운형은 러시아, 중국의 사회주의자들을 만나 시베리아에 한인군관학교 설립과 부대양성을 위한 러시아와 중국의 지원방안을 협의했다. 같은 시기 이동휘가 이끄는 고려공산당에 참가해 중앙위원과 번역 일을 맡았다. 최초로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번역하고, 영국노동당의 <직접행동>을 번역해 만주와 국내에 배포했다. 여름에는 북경에 온 미국의원단을 방문해 한국독립에 대한 원조와 지원을 요청했다. 상해에서 김규식ㆍ조동호 등 임시정부의 요인들과 함께 한국독립과 중국혁명을 위한 한중 연대를 추진했다.
1922년, 여운형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여 김규식, 김단야와 함께 대회운영 의장단에 뽑혀 개회식에서 연설했다. 이때 레닌과 트로츠키를 비롯한 러시아공산당 지도자와 일본 공산주의운동의 지도자 가타야마 센을 만나 국제연대를 논의했다. 1925년, 손문의 권유로 국민당에 입당하고, 구추백의 추천으로 중국공산당의 당원 대우를 받았다.
여운형은 손문에게 중국에 와 있던 소련 정객들을 소개해 주기도 했다. 1926년에는 광동에서 열린 중국국민당 제2회 전국대표대회에서 영어로 <중국 국민혁명의 전세계적인 사명>이란 제목의 연설할 정도로 중국혁명에 깊숙이 개입했다. 중국이 국공합작을 통해 혁명에 성공한다면 한국독립운동에 결정적 계기가 될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1928년 상해 복단대학에 취업해 이듬해 5월 대학 축구부를 이끌고 자바ㆍ필리핀 등 동남아로 원정경기에 나가 30여 차례 싱가포르 해방, 필리핀 독립을 주장하는 연설을 하다가 결국 현지 경찰에 체포됐다. 1929년 7월에는 상해에서 야구경기를 관람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돼 서울로 압송돼 옥고를 치르다가 1932년 7월에 대전형무소에서 가출옥으로 석방됐다.
■ 자주의 나라 건설에 평생을 바치다
출옥해 몸을 추스른 여운형은 1933년 2월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했다. 사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아산의 충무공 이순신의 묘소를 재정비했으며, 일제의 눈을 피해 백범 김구의 모친과 두 아들을 상해로 탈출시켰다. 그러나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처음 게재했던 일장기말소사건으로 여운형은 사장직에서 물러나고 신문도 폐간됐다. 여운형은 체육활동에도 각별한 정성을 쏟았다. 1934년 조선체육회 회장에 추대된 후 1937년 해산될 때까지 회장을 지내며 청년학생들에게 운동정신을 통한 애국심을 고취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의 패망이 멀지 않았음을 예견하고 해방 이후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다섯 차례나 일본을 방문해 고위급 인사들과 접촉해 정세를 파악하고 정보를 입수했다. 동경에서 전 조선총독을 비롯한 정치거물들과 회견을 가지는 한편 일본유학생들을 규합해 해방을 준비하도록 했다. 1942년 12월, 일본의 패망과 한국독립의 필연성을 역설한 유언비어 유포혐의로 일본에서 귀국하는 도중에 체포되어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고 형을 살다가 1943년 7월에 가석방됐다.
8월, 경성요양병원에서 조동호, 이상백 등과 조선민족해방연맹을 결성했다. 일제는 그에게 학병지원 연설, 대동아전쟁 강연회 등을 강요했으나 이를 모두 거부했다. 1944년 4월에 거짓으로 환갑잔치를 열고 동지를 불러 모아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기 위한 예비모임을 가졌다. 넉 달이 지난 8월에 삼광한의원에서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했다. 건국동맹의 규약은 불언(不言), 불문(不文), 불명(不名)이다. 1945년 3월 건국동맹 산하에 군사위원회를 조직했다.
1945년 8월 15일 여운형은 총독부와 5개조에 합의하고 치안권을 이양 받았다. 건국동맹을 기초로 조직된 건국준비위원회(건준)는 1945년 8월말까지 전국 145개 시군에 지부가 조직됐다. 여운형은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했다. 남한에서 좌우합작에 성공한 후 이를 남북연합으로 연결한다는 이들의 구상은 안타깝게도 실현되지 못했다.
남북관계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이념에 가려진 굳은 꺼풀을 걷어내고 맑은 눈으로 70여 년 전 몽양이 걸었던 길을 굽어봐야 할 때다.
김영호 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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