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을 하고도 모자라 살인까지 한 흉악범이 체포되어 경찰로 압송됐다.
흉악범이 차에서 내리자 마자 기자들이 범인을 에워싸고 질문을 쏟아 낸다.
“범행을 인정하십니까?”
“피해자와 아는 사이였습니까?”
“소감 한 말씀만 부탁합니다.”
우리 기자들은 이렇게 흉악범들에 대해서도 깍듯이 존칭어를 쓴다. 정말 그들의 범행을 생각하면 이런 존칭어를 쓰는게 타당할까 의문이 든다. 심지어 ‘인권’이라는 이유로 이름도 실명으로 쓰지 않고 A씨, B씨로 표기하거나 김모, 이모… 하는식이다.
마약사범으로 체포된 어느 재벌3세에 대한 질문도 마뜩지 않다.
“아버지가 경찰 총장과 베프라고 하셨는데 사실입니까?”
‘경찰 총장’은 경찰 간부의 직급을 잘 몰라서 한 실수였다지만 ‘베프’는 무슨 뜻인가? 신문과 TV자막에도 ‘베프’라고 큰 글씨로 내보내는데 국민 얼마나 그뜻을 이해할까? 검색을 해보니 ‘가장 친한 친구나 사람’을 뜻하는 ‘Best Friend’의 의미라고 나와 있다. 정작 영어권에서도 없는 말이 우리 나라에서 일상어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어디 ‘베프’ 뿐인가. 국적도 없는 신조어들이 매스콤과 SNS를 도배하고 있는 가운데 올 봄을 강타하고 있는 단어는 아무래도 ‘패스트트랙’일 것이다.
이것 때문에 우리 국회가 싸움판이 됐고 국회의장이 병원으로 실려 가는 등 우리 헌정사에 한 페이지 불상사를 기록하고 있다. 또 우리나라 말 같기는 한데 국회를 뒤흔든 ‘사보임’이란 무언가?
바른 미래당 김관영 원내대표는 ‘패스트트랙’ 관철을 위해 사개특위의 오신환 의원과 권은희 의원을 교체하는 ‘1일2사보임’의 초강수를 강행,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었다. 이 과정에서 육탄전이 벌어진 국회에서는 온갖 욕설이 터져 나왔고 폭력적인 언어가 판을 쳤다. 오죽하면 언론에서 이들의 욕설을 그대로 쓰지 못하고 “XX끼” 등 XX를 삽입했을까. 욕설은 물론이고 인신공격의 막말은 옮기기도 민망하다. 이럴 때, 조선 세종 때의 명재상 황희의 ‘검은소와 누렁소’의 이야기는 따뜻한 교훈이 될것 같다.
황희 정승이 어느 날 시골 길을 가다가 검은 소와 누렁소 두 마리를 부리며 밭을 가는 농부에게 물었다.
“어느 소가 더 일을 잘 합니까?”
그러자 그 농부가 황희 정승의 귀에다 대고 아주 낮은 소리로 ‘누렁 소’라고 대답했다. 황희 정승이 ‘무얼 그런걸 가지고 귀에다 속삭이느냐’고 핀잔을 주자 농부가 대답했다.
“짐승도 나쁘게 하는 말은 싫어합니다.”
이때부터 황희 정승은 아무리 낮은 사람에게라도 함부러 말을 하지 않았고 상대방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렇게 소통을 이루었고 조선 초기 어수선했던 민심을 순화시켜 나갔다.
어디 황희 정승 뿐이 겠는가.
우리 조상들은 하잘것 없는 들꽃까지도 예쁘고 해학적인 이름을 붙였다. 며느리 밥풀꽃, 처녀 치마, 할미꽃, 달맞이 꽃, 꿩 바람 꽃, 강아지 풀 같은 것이 그런 것이다.
짐승에게도 말 조심하고, 들꽃에도 예쁜 이름을 붙여 주었던 우리 조상들은 부부간에도 존댓말을 썼고 세계 언어 가운데 존댓말이 가장 발달한 것이 한국어다. 요즘 우리 보습과는 너무 상반된 풍속이었다.
백성들의 소통을 위해 한글까지 만드셨던 세종대왕이 오늘의 우리 국회를 보면 회초리를 드실 것만 같다.
변평섭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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