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독립, 일본인 추방” 함성… 들불처럼 확산
“피고들의 선동에 응하여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및 원곡면 등에서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폭동을 야기함에 이르게 한 사실로서…”(민족대표 33인에 대한 판결문 중에서)
1919년 3월 1일, 일제의 자원수탈과 무단통치에 신음하고 분노하던 조선인들이 마침내 일어섰다. 만세운동은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나가 5월말까지 타올랐다. 박은식은 3·1운동의 전 과정을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통해 자유와 독립을 향한 조선인의 위대한 행진으로 기록했다. 222개 부·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으로 7500명 이상이 살해되고, 1만6천명이 부상당했으며, 체포된 사람만 4만6천명이 넘었다.
안성 삼일운동의 불꽃, 최은식
경기도 양성은 한국독립운동사의 분수령을 이룬 3·1운동의 우뚝 솟은 봉우리이다. 당시 언론도 안성의 만세운동을 주목했다. <매일신보> 1919년 8월 10일자에 실린 ‘안성의 최은식 등 126명 예심종결, 모두 다 내란범으로 고등법원으로 보내’라는 기사가 눈길을 끈다.
“경기도 안성군에서 지난 4월 1일 밤에 촌민을 선동하여 소요 폭동을 일으킨 안성군 원곡면 최은식 외 126명에 대한 예심은 경성지방법원에서 취조 중이더니 지난 8일 오후에 종결 결정되어 피고 등은 관할이 다름으로 모두다 내란죄로 고등법원으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안성의 만세운동에 참여한 연인원은 7~8천을 헤아린다. 그런데 일제는 최은식(1899~1960)을 안성 만세운동의 주동자로 판단했다. 천안 출신으로 안성 원곡면에 살던 21세의 최은식은 이덕순, 이근수, 최두환 등과 함께 고종의 국장에 참관하기 위해 상경했던 3월 1일, 서울에서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는 만세시위 현장을 목격했다.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한 최은식은 뜻을 같이한 동지들과 마을을 돌면서 만세운동 계획을 알리고 동참을 권유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3월 28일 원곡면 지문리와 외가천리 주민들이 원곡면사무소 앞에 모여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4월 1일 저녁 8시 경 최은식은 이덕순, 홍창섭 등 동지들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에 모여든 1천여 명의 주민들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대를 이끌고 일본인 원곡면장과 서기를 끌어내어 선두에 세워 만세를 부르게 하고 양성으로 행진했다. 태극기와 횃불을 들은 시위대는 원곡과 양성의 경계인 성은고개(만세고개)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함께 시위를 주도하던 이유석(34세)이 열변을 토했다. “오늘 이렇게 많은 군중이 모인 것은 천운이다. 양성주재소로 가서 일본 순사를 끌어내어 만세를 부르게 하고 주재소를 부수자.” 최은식도 격정적인 연설로 호응했다. “조선이 독립하면 주재소, 우편소 등은 필요 없으니 부수자! 돌과 몽둥이를 들고 가서 주재소와 우편소를 불태우자! 일본 관헌이 만든 서류는 독립이 되면 쓸데없으니 불태우자! 일본인을 추방하자!”
시위대는 ‘조선 독립’, ‘주재소와 우편소 파괴’, ‘일본인 추방’을 외치며 진군하듯 양성으로 들어섰다. 같은 시각 양성에서도 여러 마을에서 주민들이 만세를 부른 후 양성면사무소가 있는 동항리로 모여들었다. 1천여 양성주민들은 면사무소와 주재소에서 만세를 부른 후 해산하려다가 원곡의 시위대와 조우하게 되었다. 2천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밤 10시 무렵 최은식 등의 주도로 양성주재소와 숙직실에 불을 지르고, 우편소와 면사무소를 부수었다. 일본인 고리대금업자의 집과 일본상인의 가게도 파괴했다.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군중과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 날 새벽 4시 무렵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최은식은 시위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를 파괴하고 방화하며 격렬한 만세운동을 벌였다. 4월 1일과 2일 무력시위를 벌인 이틀 동안 양성과 원곡은 해방 공간이 되었다. 결국 군대가 출동하여 시위를 진압하고 체포에 나섰다. 이때 최은식은 재빨리 몸을 숨겨 체포를 피했다. 그러나 일제가 그의 아버지를 경찰서로 끌고 가 혹독하게 매질을 하고 ‘최은식이 나타나면 풀어 줄 것’이라고 소문을 퍼트렸다. 사정을 알게 된 최은식이 스스로 경찰서를 찾아가 체포되었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 소요 등으로 징역 12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63년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한편 안성 출신 이유석(1886~1950)은 군대와 경찰이 집요하게 검거작전을 펼쳤으나 끝내 체포되지 않았다. 가명을 사용하며 피신생활을 하던 중에 광복을 맞이했으나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에 세상을 떠났다.
가장 격렬했던 만세운동의 성지
안성의 3·1만세운동은 원곡과 양성, 안성읍, 죽산 세 지역에서 벌어졌다. 3월 11일 11시, 양성공립보통학교에서 독립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성에서의 첫 만세운동은 서울에 유학 중이던 남진우와 고원근이 만세운동이 일어난 사실을 알리며 조회시간에 후배들을 독려하여 시작된 것이다. 저녁에는 안성 읍내 장터에서 상인을 비롯한 주민 50여명이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였다. 만세소리를 들은 경찰이 출동하여 시위 군중을 해산시키고 시위자를 체포했다. 3월 28일, 원곡면과 읍내에서 다시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원곡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의 불길은 이웃 양성으로 번져나가 폭발했다. 안성의 만세운동은 지역민의 신망을 얻고 있던 원곡과 양성의 청장년들이 조직적으로 이웃을 설득하여 일으킨 총궐기로 방화와 파괴 같은 폭력을 서슴지 않았다.
안성 읍내에서도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3월 28일 동리를 시작으로 29일에는 장기리, 30일에는 서리에서 일어났다. 서리에서는 600여명의 시위대가 동리, 서리, 장기리를 돌며 만세를 불렀다. 계속 불어나는 시위대는 안성군청과 면사무소에서 만세를 부르며 기세를 이어갔다. 4월 3일까지 이어진 시위에 3천여 명의 주민들이 참여했다.
한편 죽산지역도 4월 1일부터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죽산공립보통학교 학생 50여 명이 교정에서 만세를 부른 것이 시작이었다. 학생들의 시위에 호응한 죽산의 농민과 상인들도 죽산주재소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2일에도 학생들이 주도하여 죽산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죽산 장터에 모여든 1천여 시위 군중은 면사무소와 학교, 주재소, 우편소를 돌며 시위를 벌이자 대열은 2천여 명에 달했다. 3일까지 계속된 죽산지역 만세시위도 격렬해져 일제의 통치 기구인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파괴했다.
안성 읍내면에서는 3월 30일 김진수, 이경수, 이성옥이 주동이 되어 마을과 시장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주민들이 수백 명으로 늘어나자 이들은 사람들을 안성 경찰서 및 관청 까지 이끌고 나가 만세를 불렀다. 다음날 31일 권만동은 읍내면 동산에서 약 400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오후에는 이성옥이 마을 주민 100여 명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이성옥은 군대가 출동하여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이 없자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하고 다니다가 군병에게 체포되었다.
죽산 지역에서는 4월 1일 안재헌과 양재옥이 죽산공립보통학교에서 학생 50여 명과 주민 수백 명과 함께 주재소와 면사무소로 몰려가 독립만세를 외쳤다. 2일에는 장암리 구장 곽대용이 주민 200여 명을 모아 주재소에 몰려가 만세를 불렀다. 시위대는 주민들까지 참여하여 1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밤에는 군중 200여 명이 일죽면사무소와 경찰관 주재소에 몰려가 만세를 부르고 함성을 지르며 돌을 던졌다.
잊지 말아야할 위대한 역사의 현장
이처럼 안성에서는 주재소와 면사무소 같은 일제의 통치기구를 파괴하고 무력화시키는 과감한 투쟁을 벌였다. 격렬하게 전개되는 만세운동에 위협을 느낀 일제는 군대를 동원하여 총검으로 주민들을 학살했다. 일제 군경은 300명이 넘는 사람을 체포하여, 171명에게 징역 5월부터 최고 12년에 달하는 실형을 선고했다. 가장 치열하게 만세운동을 벌인 안성 원곡면에서만 24분이나 순국할 정도로 많은 희생이 따랐다. 만세를 부르던 현장에서 총탄에 맞아 절명한 것을 비롯해 안성경찰서에 갇혀 고문을 당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 구치된 상태에서, 혹은 복역하던 중에, 부상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숨을 거두었다.
안성 만세고개에 세워진 3·1운동기념관은 100년 전 목숨을 걸고 나라를 되찾으려 떨쳐 일어난 선열들의 피어린 역사를 담고 있는 자랑스런 공간이다. 대한민국은 이들의 거룩한 희생을 딛고 수립된 나라이다. 유공자들이 업적과 서훈을 받은 연도를 살펴보다가 탄식이 터져 나왔다. 별세한 지 40년이 지난 1990년에야 애국장을 추서 받은 이유석 선생을 비롯한 유공자의 대부분은 1990년 이후에 서훈을 받았던 것이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순국 사실을 기록으로 입증할 수 있는 유공자조차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미수훈’으로 남아 있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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