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대첩(東京 大捷)이라고 불렀다. 1997년 9월28일 있었던 경기다.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이다. 한국이 2대1로 역전 승했다. 모두 기뻐할 때 한 기자가 이런 기사를 남겼다. “한국 축구가 일본을 쉽게 이기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일 것 같다.” 그가 주목한 것은 일본 축구의 성장세다. 그리고 약관 20세의 젊은 선수 한 명이었다. 볼키핑력, 찰고무같은 근력, 넓은 시야…. 신인 나카다 히데토시에의 경고였다. ▶그 후 나카다는 일본과 아시아를 호령했다. 1997년, 1998년 연속 AFC 올해의 아시아 선수상을 받았다. 당시 세계 최강 이탈리아 프로리그에 진출했다. AS로마, 파르마, 볼로냐를 거쳤다. 세계 올스타 축구 경기에서는 잠시 주장 완장을 차기도 했다. 한국 축구팬은 나카다에 주눅들어야 했다. 일본과의 경기 때마다 나카다가 출전하는 지가 기사의 출발이었다. 2006년 그가 은퇴했다. 그때까지 10여년, 나카다는 일본인의 행복이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한국엔 21세 박지성이 있었다. 포르투갈전 골이 그 서막이었다. 명문 구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했다. 일본 선수는 버텨내지 못하는 무대였다. 그리고 2010년 5월24일, 일본 사이타마 스타디움. 박지성의 슛이 일본 골문을 흔들었다. 일본의 월드컵 출정식을 초상집으로 만든 골이었다. 그가 5만 일본 관중을 쳐다보며 운동장을 돌았다. 유명한 ‘산책 세리모니’다. ▶일본 축구팬엔 공포의 대상이었다. 2011년 아시안컵 축구 대회에서 양국이 붙었다. 결승을 앞둔 4강이었다. 연장까지 갔지만 2대2로 승부를 짓지 못했다. 승부차기까지 갔고 한국은 패했다. 이날 경기를 앞두고 일본 언론이 보였던 특별한 관심이 있다. ‘박지성 있을 때 이겨야 한다’.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한 박지성을 향한 마지막 한풀이였다. 2002년부터 꼭 10년, 박지성은 한국인의 행복이었다. ▶이강인에 국민이 환호하고 있다. 20세 이하 월드컵에서의 플레이가 환상적이다. ‘메시’의 나라, 아르헨티나 선수들을 유린했다. 마르세유 턴 등 웬만한 고급 기술을 다 장착했다. 중계하던 해설자도 말했다. “남미 선수를 상대로 우리 선수가 이렇게 개인기를 펴는 것은 처음 봅니다.” 발렌시아 유망주, 천만 유로 몸값 등의 명성은 익히 알려져 있었다. 그래도 태극기를 단 그의 플레이를 직접 본 축구팬들의 감동은 특별했다. ▶나카다로 일본 축구팬이 10년간 행복했다. 박지성으로 한국 축구팬이 10년간 행복했다. 팬들이 신인 스포츠 스타에 열광하는 이유가 그런 거다. 한번 등장한 스타로 10년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기대다. 고단한 세상을 살아가며 얻는 ‘행복 보험’과도 같은 거다. 2001년 2월19일생 이강인. 만 18세인 그의 현란한 플레이에 많은 이들이 10년짜리 행복 보험을 가입하고 싶어 한다. 김종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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