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괄의 난’ 진압 앞장서
장만은 김포를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로 23세가 되던 해 생원, 진사 양시에 모두 합격하면서 공직에 입문했다. 1599년 봉산군수로 재직하던 당시 명나라 군사가 내왕했는데 이들은 조금이라도 급식 및 처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령을 결박하고 욕을 보이는 등 행패가 심했다.
장만은 그들을 잘 다스려 도리어 환심을 사 조정으로부터 통정대부에 승계되고 동부승지로 승진하게 됐다. 생애 중반부에 시정을 극론하게 되면서 권간의 시기와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 병을 핑계로 통진으로 물러났으나 인조반정으로 새 왕이 등극하자 도원수에 임명돼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는 막중한 역할을 맡게 됐다. 이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각지의 관군과 의병을 모집해 이를 진압했다. 정묘호란 당시 후금군을 막지 못한 죄로 관직을 삭탈당하고 부여에 유배됐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복관됐으며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고 통진의 향사에 제향됐다.
김포문화원ㆍ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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