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대한문 유감

30년 전 구세군사관학교에 입교한 후 매주 목요일이면 대한문 앞에서 가로전도를 했었다. 브라스밴드와 탬버린 연주를 할 때면 바쁘지도 않은 걸음을 총총거리다가도 힐끔거리며 지나가던 행인들과 가끔은 한산한 광장의 한쪽에서 부끄러운 듯이 탁발하던 스님의 조용한 염불이 어우러지곤 했었다. 언제부턴가 그곳에는 온갖 시위대들이 우후죽순 진을 치고 있어서 한 번이라도 그 앞을 지날라치면 연간 불편하지가 않다.

지난봄 어느 토요일 오후 교우들과 함께 북악산을 등반한 후 창의문(彰義門)을 빠져나와 지하철 1호선을 타려고 서촌, 효자동, 신문로를 거쳐 정동 길을 걸어오다가 계획에 없던 덕수궁을 관람하기로 했다.

그런데 입구인 대한문의 작은 광장에는 발 디딜 틈 없이 많은 사람이 북적거렸고, 심지어 대형 무대 차량까지 점거해 소란 피우는 통에 겨우 한 명 지날 수 있는 임시 통로를 이용하면서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대한문은 대한제국의 정궁이었던 덕수궁(경운궁)의 정문이다. 을미년인 1895년 일본 낭인들에 의해 왕비를 시해당한 고종 임금은 4개월 후인 이듬해 2월 11일 비밀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하여 파천(播遷)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1년을 지낸 1897년 2월 20일 정궁이었던 경복궁으로 환궁(還宮)하지 않고 러시아와 영국, 미국 등 강대국의 공사관들이 밀집해 있었던 가까운 경운궁으로 이궁(移宮)한 후인 그해 9월 17일 고종 임금의 황제 즉위식과 더불어 경운궁은 대한제국의 정궁이 됐다.

원래 경운궁의 정문은 인화문(仁化門)이었지만 1906년 중화전 등을 재건하면서 동쪽의 대안문(大安門)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치고 궁의 정문으로 삼았으면 1907년 7월 일제의 횡포로 고종이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하면서 경운궁을 덕수궁이라고 부르게 됐다.

1910년 일제에 의해 늑탈될 때까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제국의 정궁 정문이었던 대안문(대한문) 앞에는 많은 시위가 있었다.

이전의 정궁이었던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에서 유림이 왕을 움직이기 위해 상소하며 시위했듯이 대한제국의 정궁 정문이었던 대안문(대한문)에서도 독립협회와 유림, 그리고 조선의 자주독립을 열망하는 선각자들의 상소가 끊이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때는 그곳이 상소를 들을 수 있는 귀와 시위를 볼 수 있는 눈이 있던 정치적 장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그곳은 제국의 중심지가 아니다. 백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의 덕수궁 대한문은 국내외의 수많은 사람이 방문하고 둘러보는 역사문화유산이 되어 더 이상 들을 귀도 없고 응답할 입도 없다. 정책을 요구하고 응답받아야 할 것이 있다면 시청 앞이나 청와대 앞으로 가면 될 것을 왜 굳이 좁은 대한문 앞을 점거해 관광객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구약성서 잠언에 “지혜 없는 자는 그의 이웃을 멸시하나 명철한 자는 잠잠 하느니라”(잠 11:12)고 했다. 또한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잠 12:15)고 했다.

시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지혜롭게 적절한 장소를 택해서 하라는 말이다. 역사문화유산의 장소인 그곳을 찾는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게 남겨두라는 말이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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