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 독립투쟁 ‘스피커 역할’… 백범 김구 ‘그림자 보좌’
■여주에서 태어난 일파 엄항섭…3ㆍ1 운동 목격 후 독립운동 투신 결심
일파(一波) 엄항섭(1898~1962)은 여주 금사면(현 산북면) 주록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엄주완은 승지를 지냈다. 일파는 1919년 3ㆍ1운동 당시 보성법률상업학교 학생이었다. 그는 이때 조국의 독립을 위해 거족적으로 일어난 3ㆍ1운동을 목격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한다. 곧바로 상해로 망명한 후 임시정부에 참여해 법무부 참사로 활동한다. 그때가 22살이었다. 그러나 임시정부 활동을 그만두고 항주에 소재하고 있는 지강(芝江)대학에 입학한다. 지강대학에서 그는 중국어, 영어, 불어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고급엘리트로 재탄생한다. 나중에 외국어는 일파가 임시정부의 각종 일을 처리하는데 커다란 자산으로 활용되었다.
지장대학을 졸업(1922) 후 일파는 다시 상해 임시정부로 돌아온다. 돌아와 보니 임시정부는 2~3년 전의 임시정부가 아니었다. 겨우 백범 김구와 석오 이동녕을 비롯한 소수의 사람만이 임시정부를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거기에 임시정부 청사 집세도 못 낼 정도로 경제적으로도 궁핍한 처지였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김구와 이동녕 등 임시정부 요인들은 끼니조차 제때 먹지 못할 정도로 옹색했으니 그 간난신고(艱難辛苦)를 어찌 말로 형언할 수 있으랴. 일파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임시정부는 어떻게 해서든지 존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방편으로 프랑스 조계의 공무국에 통역원이자 형사로 취직(한국사데이터베이스, 엄항섭에 관한 제문제)한다. 백범은 <백범일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엄항섭군은 뜻있는 청년으로 지강대학 중학을 졸업했다. 졸업 후 그는 자기 집 생활은 돌보지 않고 석오 이동녕 선생이나 나처럼 먹고 자는 것이 어려운 운동가를 구제하기 위해 불란서 공무국에 취직했다. 그가 불란서 공무국에 취직한 것은 두 가지 목적에서였다. 하나는 월급을 받아 우리에게 음식을 제공해 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왜(倭)영사관에서 우리를 체포하려는 사건을 탐지해 피하게 하고 우리 동포 중 범죄자가 있을 때 편리를 도모해 주는 것이었다.”
■백범의 그림자로서 임시정부에 공헌
엄항섭이 아니었다면 임시정부는 와해했을지도 몰랐다고 혹자는 말한다. 임시정부에 대한 엄항섭의 공이 그만큼 지대했다는 얘기다. 엄항섭의 부인 연미당(1908~1981) 역시 독립운동가들을 뒷바라지하는 숨은 조력자였다. 1927년 3월 20일 두 사람은 임시정부 청사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임시정부 부부 일꾼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연미당은 독립운동가 연병환(1878~1926)의 딸이자 독립운동가의 아내이며 독립운동가 엄기선(1929~2002)의 어머니이다. 독립운동가의 딸은 독립운동가 아버지를 닮아 독립운동가로 성장하고, 독립운동가 손녀 역시 독립운동가 어머니를 보고 그렇게 또 독립운동가로 컸다. 독립운동가는 독립운동가를 낳았고, 독립정신은 독립정신으로 이어졌다.
엄항섭은 임시정부에서 백범 김구를 만난 이래 서거할 때까지 백범의 그림자였으며, 측근 중의 측근이었다. 일제의 간계를 만천하에 폭로하기 위해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영문 성명서로 발표도 하고 중국어로 상해의 여러 신문을 통해 세상에 알리기도(<한민>, 一波, 윤봉길 열사의 白川 炸殺案 진상) 한다. 임시정부의 거의 모든 사업과 관련해 백범 김구의 명의로 발표된 선언문 작성, 통역, 대외 홍보활동, 대한민국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는 기사작성과 번역 등 엄항섭의 손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임시정부 선전부장 등을 역임하며 순식간에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해서 자유자재로 이에 대처해(일파, <한민>, 蘇日中立條約에 대한 감상) 약소민족은 어떻게 하면 자유를 얻고 자주적인 독립국가를 건립할 수 있는지를 설파하기도 한다.(엄항섭, <한민>, 국제정세의 변화와 약소민족이 가져야 할 각오) 또한 임시정부 승인에 대해 연합군에 결의문을 발송한 소식, 중국군 당국과 광복군이 협의한 내용, 해외 거주 한국인의 문제(이상 1944년 6월 24일 중경에서 LA로 보낸 전보), 3ㆍ1운동 24주년을 맞아 그 의미 및 정신을 미주 각국 동포에게 전해달라는 내용(1942년 신한민보에 보낸 전보) 등을 숨 가쁘게 전한다.
해방 후에는 환국해 김구가 중국어로 쓴 <도왜실기(屠倭實記)>를 번역(김구선생혈투사, 국제문화협회, 1947)해 출판하기도 한다. 일본은 청일전쟁(1894) 이후 상해에 일본영사관을 설치하고 임시정부 요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일본 총영사는 통역원으로 일하는 엄항섭을 체포하기 위해 프랑스 총영사에게 엄항섭 체포영장을 교부해 줄 것을 몇 번이고 요청한다. 그러나 프랑스 총영사는 엄항섭은 중국에 귀화한 엄경민이라고 말하며 체포영장 교부를 거절(한국사데이터베이스, 엄항섭에 관한 제문제)한다. 엄항섭은 임시정부를 지켜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국적도 중국 국적으로 위장해야만 했다. 임시정부의 숨은 일꾼에게 위장 전술은 필수였다. 그 덕분에 상해 임시정부는 이봉창ㆍ윤봉길 의사의 의거 뒤에도 일제의 물샐틈없는 정보망을 피하며 추격을 따돌릴 수 있었으리라.
이후 일제가 엄청난 현상금을 내걸고 김구를 체포하려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엄항섭은 김구 곁을 떠난 적이 없다. 윤봉길ㆍ이봉창 의사의 의거에 크게 감동한 장개석을 만나러 갈 때도 그는 곁에서 보이지 않게 수행하며 보좌했다. 김구가 국무령이 되어 임시정부를 활성화하려 할 때도 헌법기초위원이 되어 김구의 의도를 간파하고 단일지도체제를 집단지도체제로 개정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기도 한다. 27년간 임시정부 청사를 7번 옮기면서 수천 킬로를 이동할 때도 바늘과 실처럼 늘 함께 했다.
■납북 이후 잊힌 독립운동가
중경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을 거행했다. 1907년 군대가 해산된 이후 임시정부 직할 군대가 마침내 창설된 것이다. 엄항섭은 광복군 발족을 위한 전례식의 제반 준비와 행사 실무를 맡아 추진했다. 또 광복군이 창설되었다는 사실과 광복군은 결코 어느 한 정당, 어느 한 단체의 군대가 아니고 한국의 국군임을 <한민>이나 <신한민보> 등의 기고를 통해 알린다. 광복군이 국내 진공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준비하던 중 느닷없이 광복이 되었다. 일본이 패망한 것이다.
엄항섭과 백범 김구 등 임정요원 제1진은 1945년 11월 23일 임시정부 요원이 아니라 각각 한 사람의 시민자격으로 환국(환국 성명서)한다. 독립운동의 대장정을 마치고 완전히 자주 독립할 통일된 신민주 국가 건설을 꿈꾸면서 그토록 그립던 조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백범 김구는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총탄에 맞아 서거(1949)하고 만다. 청천벽력이었다. 엄항섭은 추도사에서 “선생님, 선생님 민족을 걱정하시던 선생님의 말씀을 저녁마다 듣자왔는데 오는 저녁부터는 뉘게 가서 이 말씀을 듣자오리까. 선생님, 선생님 민족을 걱정하시던 선생님의 얼굴을 아침마다 뵈웠는데 내일 아침부터는 어데 가서 그 얼굴을 뵈오리까. 선생님은 가신대도 우리는 선생님을 붙들고 보내고 싶지 아니 합니다.” 목자(牧者)를 잃은 엄항섭은 백범 김구 선생을 보낼 수 없었다. “그래 이것이 선생님에게 바친 최후의 보답입니까”(추도사) 하고 울분을 토한다.
엄항섭은 6ㆍ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납북됐다. 중국 북간도에서 독립운동가의 딸로 독립운동가의 어머니로 살았던 연미당은 조국에는 진정 삶의 터전이 없었다. 연미당은 미군 군복 빨래 일을 하며 갖은 고생을 하다 별세했고, 장녀 엄기선은 전쟁미망인을 돌보는 ‘루시 모자원’을 운영하다 사망했다.(엄기남, kbs 독립투사 연미당) 엄항섭은 납북된 후에도 통일을 위해 진력하다(한시준) 1962년 7월 끝내 운명하고야 말았다. 독립운동가 집안의 수난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이들에 대한 연구는 물론 조명조차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여주 엄항섭의 집터 또한 누구 하나 건드리지 않고 아직도 텅 비어 있다. 독립운동가의 생가터 라기보다는 납북자의 집터였기 때문은 아닐까.
엄항섭은 조국 독립의 횃불을 밝히기 위해 역사의 부름에 응했다. 그는 월급을 쪼개가며 임시정부 요인들의 끼니를 챙겼고, 뛰어난 외국어 능력과 탁월한 문장력, 국제정세를 읽는 통찰력을 발휘하면서 임시정부의 살림꾼으로 종횡무진 활약했다. 역사는 카리스마 넘치는 영웅만의 역사가 될 수 없다. 굴곡진 역사의 구비 구비마다 수많은 민초들의 손길이 닿아 있다. 그 손길은 일파(一波)가 되고 만파(萬波)를 일으켜 역사의 격랑을 거세게 헤쳐나간다.
권행완 정치학 박사(다산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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