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倭)가 쳐들어왔다. 육군 정규 병력만 15만8천700명이다. 해전에 대비한 수군이 9천명이다. 후방 경비를 맡을 병력도 1만2천명이다. 대략 20만명에 달한다. 1592년 4월14일 오후 부산 앞바다에 그들이 나타났다. 선발대 병선 700척이 바다를 덮었다.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정발(鄭撥ㆍ부산진 첨사), 송상현(宋象賢ㆍ동래부 부사)이 전사했다. 왜군을 막을 장수는 아무도 없었다. 5월2일 고니시의 부대가 서울에 진입했다. ▶도륙과 약탈이 강토를 휩쓸었다. 백성의 참혹함이 역사로 기록돼 있다. ‘부자가 서로 잡아먹고 부부가 서로 잡아먹었다. 뼈다귀를 길에 내버렸다’(징비록). ‘굶어 죽은 송장이 길에 널렸다. 한 사람이 쓰러지면 백성들이 덤벼들어 그 살을 뜯어 먹었다’(난중잡록). 명나라 군사들이 술 취해서 먹은 것을 토하면 주린 백성들이 달려들어 머리를 틀어박고 빨아 먹었다. 힘이 없는 자는 달려들지 못하고 뒷전에서 울었다(난중잡록). ▶굶주리고 있기는 수군도 마찬가지였다. 이순신이 임금에 올린 장계와 일기에 실상을 적어놓고 있다. ‘경상우도의 여러 고을은 군량이 이미 바닥났습니다. 군사를 모집해온들 무엇으로 먹이겠습니까. 답답하고 또 답답합니다’(1593년 11월17일ㆍ장계). ‘영남의 여러 배에서 격군과 사부들이 거의 굶어 죽게 되었다. 참혹하여 들을 수가 없다’(1594년 1월19일ㆍ난중일기). 하지만, 그는 싸웠다. 배를 만들고 작전을 세웠다. ▶그가 희망이었다. ‘나 홀로 연승’이었다. 고니시 부대가 서울에 입성한 직후 첫 승전보를 올렸다. 1592년 5월4일에서 8일에 걸친 해전이었다. 이순신 함대는 이 격전에서 적선 37척을 파괴하고 이겼다. 이후 정유재란에 이르는 7년간 이순신은 모두 이겼다. 그 기간 격파한 왜 수군 함선이 1천163척이다. 사망한 왜 수군은 4만9천~11만명으로 추정된다. 우리 쪽 피해는 함선 격파 0척, 사망자 52명이다. ▶임금은 서울을 버렸다. 그 임금을 백성이 버렸다. 백성에게 희망은 이순신이었다. ‘불안해진 백성들이 수영으로 나를 찾아왔다. 또 백성을 버리고 떠날 작정인지, 백성들은 울면서 물었다. 백성들은 수영 마당을 이마로 찧으며 통곡했다. 나는 숙사 툇마루에 걸터앉아 우는 백성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소설 ‘칼의 노래’ 중에서). 마지막 노량해전을 위해 고금도 덕동수영을 떠날 때 백성들의 모습이다. ▶일본이 쳐들어왔다. 이번엔 경제다. 반도체를 죽여 우리를 도륙 내겠다고 덤빈다. 또 한 번의 이순신이 필요해졌다. 적진에 침투할 이순신, 23번 싸워 23번 이길 이순신이 필요해졌다. 그런데 없다. 대신 온통 구호뿐이다. 경쟁력 높이겠다는-언제 될지 모르는-구호, 강경 대응하겠다-국내 언론에만 보도되는-는 구호뿐이다. 말장난만 하던 420년 전 조정(朝廷)이 생각난다. 그 조정은 결국 신주(神主) 싸들고 의주로 내뺐었다. 김종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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