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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시 읽어주는 남자] 쉬
문화 시 읽어주는 남자

[문화/시 읽어주는 남자] 쉬

[문화/시 읽어주는 남자]  쉬

문인수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 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였다고 합니다.

온 몸, 온 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땅에 붙들어 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쉬』, 문학동네, 2006.

네다섯 살 때쯤이었다. 바지를 올리고 내리는 게 민첩하지 못해 급하게 얼굴만 찡그리며 “오주움~”이라고 길게 외치면 아버지가 다가와 내 바지를 내리고 “쉬”하며 소변을 보게 하셨다. 그렇게 하시는 게 당연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신 아버지를 보면 습관적으로 “오줌”이라는 말을 자주 남용했다. 아무런 동작도 하지 않고 볼일을 볼 수 있었으니 딴엔 아주 편리했다. 그러다가 어느 때부터인지 내가 알아서 소변을 보게 되었다. 목욕탕에 가서도 두 손으로 그곳을 가리게 되었다. 어디 한번 보자며 손을 내뻗는 아버지를 향해 싫다고 소리치며 울고불고 난리를 떨었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그 이유를 정확히 모르겠다. 빈곤한 추측이지만, 아버지와 나 사이에 뭔지 모를 어색함 같은 게 생긴 것 같았다. 그 이후부터 아버지는 늘 ‘불만’의 대상이 된듯했고, 그렇게 시작된 ‘심리적 불효’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이어졌다.

문인수 시인의 ?쉬?는 대책이 없을 만큼 울컥하다. 환갑이 지난 아들이 아흔이 넘은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누이는 저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설명’이라는 단어를 운운하는 것 자체가 이미 불손(不遜)하다. “생의 요긴한 동작”이 다 떠난 아버지의 ‘노구’는 곧 아들의 몸일 것이다. 어린 아들을 안고 오줌을 누이시던 아버지를 이제는 아들이 안고 오줌을 뉘게 해야 하는 ‘갚음’의 필연적 관계, 그것이 아버지와 아들의 운명이고 역사다. “농하듯 어리광부리듯” 오줌을 뉘여야 하는 아들의 시간은 아버지가 내민 어떤 ‘끈’의 결속이다. 애틋함이다. 정신은 아직 ‘초롱’하였기에 “더 작게, 더 가볍게” 몸을 움츠려서라도 아들의 힘겨움을 덜어내고자 애를 쓰는 아버지의 마음. 그것이 바로 “길고 긴 뜨신 끈”으로 연결된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다.

모든 ‘끈’들의 맺음이 그렇듯 언젠가는 한쪽으로부터 풀리기 마련이다. 삶과 죽음의 끈도 그러하다. 그러나 그 끈들의 역사는 영원하다. 아버지의 아버지로부터 이어지는 뜨신 끈들의 베품과 갚음의 이어짐. 그 길고 긴 사연들을 문인수 시인은 ‘쉬’라는 한 음절의 의성어에 조용히 담아낸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을 생각하며 “쉬!”라고 읊조려본다.

신종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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