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 1천400년전 日本이 한반도에서 치른 첫 전쟁

660년 7월 신라는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를 정복시켰지만 전후 처리가 신라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신라 입장에서는 생포한 백제 의자왕을 서라벌(경주)로 압송하여 처형을 해야하는데 당나라는 그렇지 않았다.

소정방은 의자왕을 비롯 왕자 및 신하 93명 그리고 1만2천여 백제 요인을 끌고 660년 9월3일 당나라로 떠났다.

신라는 전승국이지만 아무것도 차지 못하고 구경만 해야했다.

당나라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백제를 신라에 돌려 주지 않고 ‘웅진도독부’를 세워 의자왕의 왕자 융으로 하여금 백제 땅을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니까 ‘친(親) 당’ 정권을 세운 것이다. 나아가 지금 공주 취리산에 올라 제단을 쌓고 백마를 잡아 그 피를 나누어 마시며 신라 문무왕, 백제 왕자 융, 그리고 당나라 장군 유인원이 화해와 국경 존중의 맹세를 했다. 신라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으나 어쩔수 없었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취리산회맹’이라는 것이 이것이다.

결국 백제 땅이 중국(당)의 새로운 영토가 된 것에 일본도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백제로부터 문화를 고스란히 전수받으며 각별한 친교를 누렸는데 그 백제가 당나라 지배하에 들어 가다니…. 일본으로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그런데다 일본으로서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백제의 부흥운동이 활발하게 전개 되어 200개의 많은 성(城) 들이 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부흥운동의 중심지는 충남 서천군 한산면에 있는 주류성(周留城), 부흥군을 이끄는 지도자는 왕족 복신(福信)과 승려 도침(道琛) 그리고 장군 흑치상지 였으며 이들은 일본에 있던 왕자 풍을 모셔와 부흥 백제의 상징이 되게 함으로써 더욱 기세를 높였다.

이런 가운데 일본은 한반도에서 당나라 군사를 중국으로 몰아내고 다시 백제왕국을 세울 기회라고 판단하고 663년 8월, 2만7천명의 군사를 파병했다.

그리고 이들 대규모 선단은 금강하구를 통해 사비성(부여)을 향했는데 이것은 강 양편 산과 계곡을 우군이 확보해 주지 않는 한 매우 위험한 작전이었다. 그런데 나·당 연합군이 먼저 이 지형지세를 선점했으니 일본군은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다 한참 기세가 오르던 부흥군은 내분에 휩싸였다.

주도권 싸움에서 왕족 복신이 승려 출신 도침을 살해하여 부흥군 진영이 크게 동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어 부흥군의 상징이던 왕자 풍이 도침을 살해한 복신을 죽이고 고구려로 도피했고 부흥군의 최고 장군이던 흑치상지마저 진영을 버리고 당나라 유인원장군에게 항복을 했으니 부흥군은 그야말로 지리멸렬되고 말았다.

따라서 금강 양안의 안전루트를 확보하지 못한 일본군 2만7천명은 나·당 연합군의 협공에 제대로 싸워 보지 못하고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8월28일 백강전투는 그렇게 끝났다.

이것이 한반도 역사상 한·일·중이 이땅에서 벌인 최초의 국제전이었다. 그 후에도 벌어질 한반도의 지정학적 운명의 신호탄이기도…. 오늘 강대국들에 둘러싸여 ‘사면초가’가 된 우리 입장에서 되새겨 볼 역사다.

변평섭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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