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 황동규
내 그대에게 해주려는 것은
꽃꽂이도
벽에 그림 달기도 아니고
사랑 얘기 같은 건 더더욱 아니고
그대 모르는 새에 해치우는
그냥 설거지일 뿐.
얼굴 붉은 사과 두 알
식탁에 얌전히 앉혀두고
간장병과 기름병을 치우고
수돗물을 시원스레 틀어놓고
마음보다 더 시원하게,
접시와 컵, 수저와 잔들을
프라이팬을
물비누로 하나씩 정갈히 씻는 것.
겨울 비 잠시 그친 틈을 타
바다 쪽을 향해 우윳빛 창 조금 열어놓고,
우리 모르는 새
언덕 새파래지고
우리 모르는 새
저 샛노란 유채꽃
땅의 가슴 간지르기 시작했음을 알아내는 것,
이국(異國) 햇빛 속에서 겁 없이.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문학과지성사, 2000
세상이 시끄럽다. 분노와 시기가 뒤섞여 곳곳마다 삶의 표정이 깨진 병조각처럼 예리하다. 이 위태로움은 ‘비교’(比較)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나보다’ 혹은 ‘너보다’라는 심중의 잣대는 칼날처럼 날카로워 상처를 내고 만다. 더 많은 것을 갖고 싶고, 더 큰 것을 얻고 싶은 욕망의 뒤편에는 비교의 ‘민감한’ 눈금이 있다. 큰 것을 바라는 일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니지만 비교의 촉수가 잘못 뻗치면 인간관계의 원한과 좌절을 가져올 수 있다. 원한과 좌절이 만연하면 세상은 차가워진다. 사랑도 비교의 덫에 걸리면 결점의 무덤이 된다. 과잉된 욕망은 작은 것들이 지닌 섬세하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정감의 세계를 나약(懦弱)의 결과처럼 여긴다. 그러나 진정으로 나약한 것은 과잉의 허세일 것이다.
황동규 시인의 시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는 작은 것들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새삼 느끼게 한다. 삶의 아름다움은 누군가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에서 생긴다. 그 간단한 마음이 바로 사랑이다. “내 그대에게 해주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사랑이겠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다. 남들보다 더 크고 화려한 것을 해주고 싶은 비교의 욕망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다. 사랑의 특별함은 ‘꽃꽂이’이나 ‘사랑 얘기’ 같은 것이 아니라 일상의 ‘설거지’처럼 일상의 사소한 것을 “그대 모르는 새”에 해치우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시인의 생각이다. 사실 설거지는 누구에게나 귀찮은 일이다. 그 귀찮음을 견디게 만드는 힘은 ‘사과 두 알’을 식탁에 예쁘게 올려두는 것처럼 일상을 ‘미적(美的)’으로 배치하고 정리하는 섬세함에서 나온다. 바다 쪽을 향해 창을 열어 놓고 “우리 모르는 새”에 유채꽃이 “땅의 가슴을 간지르기 시작했음을 알아내는 것”이 일상의 사랑이고 감동일 것이다. 그렇지만 설거지를 한다고 해서 사랑이 다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니다. 일상을 가꿔가는 ‘미적’ 섬세함이 있어야만 이국(異國)의 햇빛처럼 사랑이 ‘겁 없이’ 환해진다.
신종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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