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비운의 쿠르드족

이연섭 논설위원 yslee@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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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군이 지난 9일(현지시간) 시리아 국경의 쿠르드족(族)에 대한 군사 공격을 개시했다. ‘평화의 샘’이라 명명한 군사작전으로 사상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쿠르드족 피난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간단한 가재도구와 옷만 트럭에 싣고 떠나는 사람들로 도로가 가득 차고, 차 없는 사람들은 등짐을 지고 걸어서 피난길에 올랐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은 7만 명의 쿠르드족이 피난을 떠났다고 밝혔다. 구호단체 국제구조위원회(IRC)는 30만 명이 피난길에 오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쿠르드족이 미국과 동맹을 맺고 이슬람 극단세력 IS 격퇴전을 벌일 때만 해도 터키는 쿠르드족을 건드릴 엄두도 못 냈다. 시리아 쿠르드족은 민병대를 조직해 미군과 2017년 IS 수도인 락까를 탈환하고, 지난 3월엔 IS의 최후거점인 바구즈를 함락시키는 데 일조했다. 5년에 걸친 IS 격퇴전에 쿠르드족은 병력 15만 명을 동원했고 1만1천여 명이 전사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쿠르드족에게 엄청난 돈과 장비가 들어갔다. 우리 이익이 되는 곳에서만 싸울 것”이라며 미군 철수를 결정했다. 쿠르드족은 미군 철수에 대해 ‘혈맹이 등에 비수를 꽂았다’며 배신감을 표했다. 미 공화당에서조차 ‘동맹에 대한 배신’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토사구팽(兎死狗烹)’ 당한 쿠르드족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내몰렸다.

‘중동의 집시’ 쿠르드족은 독립국가를 갖지 못한 세계 최대 민족이다. 주로 터키 남동부, 시리아 북동부, 이라크 북부, 이란 남서부, 아르메니아 남서부 등 5곳에 흩어져 사는데 전체 3천만∼4천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쿠르드족은 20세기 초 ‘쿠르디스탄’이라는 독립국을 세우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연합국과 동맹국이 서명한 세브르조약엔 쿠르드족의 독립국 건설을 보장한다는 내용이 담겼으나 서방국가들이 약속을 어겼다. 쿠르드족은 독립국 약속을 믿고 서방국가와 함께 싸웠으나 전쟁 후 토사구팽 당해 지금처럼 흩어져 살게 됐다.

쿠르드족의 절반에 가까운 1천500만 명은 터키 동남부에 거주한다. 터키는 쿠르드족 분리ㆍ독립을 주장해온 쿠르드노동자당(PKK)을 테러단체로 지목해 탄압해 왔다. 시리아 쿠르드와 PKK가 손을 잡으면 국가 기반이 흔들릴 우려가 있어서다.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도 PKK 제거를 공공연히 언급했다.

수천만이나 되는 쿠르드족은 국가를 건설하지 못해 전쟁에 휘말리고, 강대국들 사이에 배신 당하는 역사만 되풀이하고 있다. 나라가 없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전쟁은 참혹하다. 대규모 살상은 막아야 한다. 수십만 명의 난민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IS가 다시 창궐할 수도 있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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