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경자년, 아름다운 경자자를 생각하며

경자년(庚子年) 하얀 쥐띠해의 초이틀이다. 새해가 시작되면서 저마다 올해의 다짐을 새롭게 할 것이다. 나도 매년 새해 오늘이면 올해의 새로운 다짐을 하곤 한다. 또 학교 신년하례식에 참석해 인사와 덕담을 교직원 선생님들과 교수님들께 드린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우리 독자 여러분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경자년과 관련된 이야기를 생각하면, 나는 경자자(庚子字)라는 구리활자가 생각난다. 경자년에는 이 구리활자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여러 말로, 조선시대는 ‘성리학의 나라’였고, 고려시대나 통일신라시대는 ‘불교의 나라’였으며, 더 고대에는 하느님 아들인 환웅과 곰인 웅녀의 아들인 ‘단군의 나라’였다고 할 수 있다. 또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적던 표기법인 이두를 집대성한 것이나, 세종의 한글 창제 덕에 ‘문자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또 전 세계 고인돌의 3분의 2가량이 동이 문화 지역에 분포하고 있어서 ‘고인돌의 나라’라고 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는 이미 13세기경 고려시대에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해 쓰기 시작했다. 경자자는 1420년(세종2년) 경자년에 만든 활자라 붙여진 이름이다. 이 구리활자는 우리나라(조선)에서 두 번째 만들어진 구리활자다. 첫 번째 만들어진 구리활자는 1403년(태종3년) 계미년에 만들어진 계미자(癸未字)다. 또 1434년(세종16년) 갑인년(甲寅年)에는 세 번째 구리활자인 갑인자(甲寅字)가 주조되었다. 계미자는 10만 자고, 계미자는 20만 자나 된다. 고려시대에는 주로 납을 사용했지만, 조선대에는 고려대의 납보다 강한 구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 밀(蜜)로 활자를 고정하던 것을 식자판(植字版)을 조립하는 방법으로 개선해 고려시대보다 두 배 정도의 인쇄 효율이 올랐다고 한다. 변계량(卞季良, 1369-1430) 같은 이는 그의 ‘갑인자발(甲寅字跋)’에 “인쇄되지 않은 책이 없고, 배우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표현할 정도로 가히 혁명적 시대였다. 당시 하루에 만드는 활자 주조 수량은 당시 유럽의 구텐베르크가 만든 수량보다 약 10배 정도 더 많은 3천500자였다고 한다.

경자자는 조선 최초의 구리활자인 계미자의 단점을 보완하여 만든 두 번째 구리활자로, 계미자를 보완하여 개주(改鑄)하라는 세종의 명(命)에 따라 1420년(세종2년) 경자년에 새로 만든 것이다. 경자자는 계미자보다 모양이 작고, 더 가지런하다. 계미자의 활자 모양은 끝이 송곳처럼 뾰족했는데, 경자자는 네모 반듯한 입방체로 바뀌었다. 글자는 성품의 표상이다. 태종대의 계미자가 크고 날카롭고 거칠었다면, 세종대의 경자자는 보다 작고 부드럽고 반듯했다. 주조도 훨씬 부드러워졌다. 인쇄도중 계미자보다 활자동요를 낮추어 인쇄 능률도 높였다. 인쇄방식도 밀납을 판에 녹여서 글자를 배열하던 방식을 개량해, 글자 모양에 알맞게 인판을 만들고 죽목(竹木)으로 각 활자의 공간을 메우는 방법을 새롭게 활용했다. 비용은 절감됐고, 인쇄량과 인쇄 효과도 더욱 올라갔다.

경자년에 우리 모두 지난 일을 개선하며, 능률도 높아지되, 마음도 더욱 반듯하고 차분하고 부드러워져 행복한 해가 되길 기원한다.

김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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