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든은 오스트리아 동부의 작은 마을 로라우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로라우란 지역은 헝가리, 슬로바키아와 인접한 곳으로, 이들 지역은 각각 독특한 자신만의 민요를 지니고 있었다. 하이든은 이런 다양한 민요들을 접하면서 자랐는데, 이는 후일 그의 음악에 크나큰 원천으로 작용했다.
음악적 재능이 남달랐던 하이든은 다섯 살 때 음악을 시작했다. 노래 실력도 뛰어나 8세 무렵 성슈테판 성당 소년합창단 단원이 된다. 그러나 17세 즈음 변성기로 인해 합창단을 나오게 된다. 그때부터 10년간 무한한 자유와 함께 불안정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가난했던 하이든의 부모는 아들이 음악가가 아닌 성직자가 되길 바랐다. 하지만, 이미 음악가로 진로를 확고히 정한 하이든은 독학으로 작곡 공부를 하면서 아르바이트 피아노 교사, 성악 반주자, 귀족 집안 실내연주자 등 닥치는 대로 수많은 일을 하며 고생스럽게 지낸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은 틀지지 않았다. 10여 년의 고생 끝에 드디어 하이든에게도 행복한 시절이 열리게 된다. 헝가리의 귀족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니콜라우스 후작이 하이든의 교향곡에 매료된 나머지 하이든을 그의 가문에서 운영하는 악단의 부악장으로 임용하게 된 것이다. 1761년 5월 1일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지가의 부악장으로 취임하게 되고 5년 뒤부터는 악장으로 승진, 이후 1790년까지 30년에 가까운 세월을 악장으로 지낸다.
하이든은 귀족 집안의 충실한 음악가로 지내며 밝고 명쾌한 수많은 곡을 썼는데, 거기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숨어 있었다. 많은 곡을 남긴 것은 귀족을 위해 일주일에 두 편의 교향곡을 무조건 제출해야 하는 의무 때문이었고, 밝고 명쾌한 곡을 쓴 것은 귀족을 무조건 기쁘게 해 줘야 했기 때문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그는 에스테르하지가의 음악가로 지내는 30년 동안 교향곡, 현악 4중주, 피아노 소나타, 오페라, 칸타타 등 엄청난 양의 작품을 남겼다.
후작이 사망한 후 다시 빈으로 돌아온 하이든은 1791년 런던으로 돌아가 새로운 교향곡을 작곡한다. 런던에서 그의 교향곡은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사람들은 열광했다. 영국 왕실에서도 무척이나 총애하여, 그가 런던을 떠나 다시 빈으로 돌아올 때 수많은 선물을 하사하기도 했다.
말년의 하이든은 다시 에스테르하지 집안의 악장으로 되돌아가 그곳에서 그의 일생에 다시없는 대작을 남기게 된다. 그것은 바로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듣고 그 감동으로 만들게 되었다는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이다.
대부분 음악가가 괴팍하고 폐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면, 하이든은 이와 달리 온화하고 재치가 넘쳤다. 늘 사람들을 배려하고 감싸 주었던 따뜻한 음악가 하이든은 ‘파파 하이든’이라는 별명까지 얻으며, 77세로 생을 마감하던 순간까지도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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