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 반복 막아달라” 이천 물류창고 화재 유가족, 대책 마련 촉구

▲ 29일 오전 이천 물류창고 화재 유가족 일동이 청와대 앞에서 책임자 처벌과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장희준기자

노동자 38명의 소중한 삶을 앗아간 ‘이천 물류창고 화재’가 발생한 지 한 달이 지나도록 진상 규명은 물론 제도 개선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어(경기일보 29일자 4면) 유가족들이 청와대, 한익스프레스 본사 등을 찾아 책임자 처벌과 대책 수립을 촉구했다.

29일 오전 10시30분께 청와대 앞 광장은 슬픔과 분노의 물결로 가득 채워졌다. 유가족 80여명은 기약 없이 늦어지는 화재의 원인 규명과 정부의 말뿐인 대책 수립을 지적하며 조속한 사태 수습을 요구했다.

박종필 유가족대책위원회 대표는 “불은 날 수 있으나, 왜 대피를 하지 못했나 알고 싶다”며 “사고의 원인을 밝혀내고 그에 따라 법을 개정하지 않는다면 이 같은 참사는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라고 질책했다.

이어 유가족 법률 대리인 김용준 변호사(법률사무소 마중)는 “한 달이 지나도록 아무 조치도 취해지지 않아 유가족들이 이렇게 모인 것”이라며 “한익스프레스, 건우 등 관계 업체들은 아직도 수사 결과를 지켜보자며 책임을 회피하려고 한다”고 주장했다.

대표자들이 발언을 이어갈 동안 유가족들은 차오르는 울분을 참지 못해 오열하거나 주저앉기도 했다. 한 유가족은 목에 걸린 망자의 사진을 어루만지며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 29일 오전 이천 물류창고 화재 관련 기자회견 중 한 유가족이 망자의 영정을 어루만지며 슬퍼하고 있다. 장희준기자

경기일보와의 인터뷰에 응한 손주영씨는 ‘아직도 형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는다’며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지난달 초 어머니의 건강을 걱정하며 안부를 주고받았던 통화가 손씨에게 형이 남긴 마지막 기억이 됐다. 손씨의 형은 설비작업에 참여했다가 변을 당했다. 망자는 아내와 딸, 아들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고 그의 막내아들은 아직까지 아버지의 죽음을 모르고 있다.

손씨는 “사고 당일 소식을 듣고 달려오며 ‘설마 나에게도 이런 일이 벌어질까’ 싶었다”며 “코에 그을음이 가득하고 입에 각혈의 흔적이 남은 형의 시신을 보고서야 현실이라는 걸 깨달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평생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던 형님께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고된 일을 하다가 돌아가셨다고 생각하니 지금도 목이 메인다”며 참아오던 울음을 터뜨렸다.

 

▲ 29일 오후 서울 서초구 한익스프레스 본사 앞에서 유가족들이 이천 화재 관계 업체명이 적힌 영정에 국화꽃을 놓는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장희준기자

이날 오후 2시께 유가족들은 서울 서초구 한익스프레스 본사를 찾아 규탄을 이어갔다. 이들은 한익스프레스(시행사), 건우(시공사), 전인CM(감리사) 등 사고 관계 업체들의 이름이 적힌 영정에 하얀 국화를 놓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사태를 수습하고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 하나 없이 모두 ‘쥐 죽은 듯’ 서로에게 책임을 떠밀고 있음을 비판하기 위한 연출로 풀이된다.

한익스프레스 관계자 2명과 대담을 마친 박종필 대표에 따르면 한익스프레스 측은 다음달 10일까지 합의금 마련 등에 대한 대책을 내놓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유가족들은 한익스프레스를 비롯한 건우 등 관계 업체들이 희생자와 유가족을 찾아 진정한 사과의 뜻을 밝힌 적조차 없다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오후 5시께 이천으로 돌아온 유가족들은 화재 현장을 찾아 묵념을 올리며 애도의 시간을 가졌다. 이어 이천 서희청소년문화센터의 합동분향소로 이동,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합동추모식으로 유난히 길었던 하루를 마쳤다.

박종필 유가족 대책위원회 대표는 “희생자들 모두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빠이며 아들이다”라며 “정부는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말만 할 것이 아니라, 명확한 재발방지대책 수립으로 노동자가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는 안전한 환경을 만들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정오ㆍ장희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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