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 1748-1825)가 그린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라는 유화는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시고 죽기 직전에 그의 생각을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전하는 모습을 회화한 작품이다. 이 그림에는 네 유형의 사람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하나는 스승의 죽음을 슬퍼하고 아파하는 제자들의 모습이고 또 하나는 죽음을 앞둔 스승의 유훈과 같은 가르침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로 집중하는 제자들의 모습이며, 그리고 나머지 둘은 멀리서 그것이 마치 남의 일인 듯 지켜보는 사람과 아예 관심도 없다는 듯이 등 돌리고 계단을 올라가는 사람의 모습이다.
소크라테스는 신을 부정하고 그의 가르침으로 인해 젊은이들이 타락했다는 이유로 아테네 정부로부터 고소당했고.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고 독배를 마셨다고 한다. 사실 여부야 어떻든지 여론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 분명한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살해당해야 하는 사람에 대한 사회의 관심과 태도이다. 어떤 이는 동정하고, 어떤 이는 추종하고, 어떤 이는 구경하고, 어떤 이는 아예 관심도 없다. 물론 그중에 동정하고 추종하는 것이야 그 살해당하는 사람의 인물됨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구경거리로 여기거나 관심조차 주지 않는 것은 암묵적 동의(同意)고 사회적 방기(放棄)라 할 수밖에 없겠다.
여론(與論)이란 ‘사회 대중이 공통으로 제시하는 의견’을 말한다. 보편적인 목소리라는 말이다. 민주 사회를 이끌어 가는 방식으로서 건전한 사회 형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원리이다. 그러나 여론이 호도(好導)되기보다 조작되고 오도(誤導)되어질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특히 SNS의 급격한 발달로 인해 여론은 ‘댓글’이란 이름으로 제멋대로 조작되고 재생산될 뿐만 아니라, 살벌한 독침이 되어 사람을 가리지 않고 저격(狙擊)하여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신음하게 하다가 극단적 선택을 하게도 한다. 댓글 살인이다. 이럴 때 이 댓글이라는 오용된 여론을 다루고 대하는 태도이다. 대체로 같은 생각이 있는 사람들끼리 어울려 생각이 다른 사람을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독설로 접근도 하지 못하게 하여 그 문제는 구경거리가 되고 무관심거리가 되어버리게 한다. 소크라테스도 그렇게 살해당했을 것이다.
신약성경 야고보서에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야고보서 3:2)고 하였다. 또한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야고보서 3:6)고 하였다.
여론은 공감하여 서로를 위하고 살리는 소리가 되어야지 살해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댓글도 그렇다. 그런데 SNS에서 떠도는 수많은 여론과 댓글은 여전히 수많은 소크라테스를 살해하고 있다. 이럴 때 여론과 댓글은 지옥 불에서 난 불의(不義)한 도구이고 살해의 도구이다. 그렇게 어떤 저명한 사람은 여론으로 고통당했었고, 어떤 연예인은 댓글에 시달리다가 자살했다 하고, 어떤 불특정 시민들은 본의 아닌 일로 지금도 댓글에 괴로워하고 있다. 가뜩이나 코로나로 위협당하고 고통당하며 죽어가는 것도 억울한데, 소크라테스의 죽음처럼 구경거리나 무관심거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 살해의 독침이 언제 어떻게 나에게 날아들어 소크라테스처럼 죽게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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