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의 초상화나 캐리커처를 보면서 어떤 인상을 받을까. 필자에게는 꽉 다문 입매와 곱슬 거리다 못해 마구 헝클어진 머리칼이 매우 인상적이다. 곱슬머리가 고집이 세다는 말이 있듯 그의 고집은 무척 셌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무조건 자기가 맞다고 우기는 아집이 아니라 ‘음악적 고집’이었다.
베토벤은 당시 상황에서 볼 때 음악적 혁명이나 다를 바 없는 일을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작곡한 작품으로 정식 출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음악인들은 왕이나 귀족에게 고용되어 그들이 요구하는 음악을 만드는 수동적인 삶을 살고 있었기에 작품 출판은 음악가로서의 ‘자립’을 의미했다. 베토벤은 더 이상 귀족의 구미에 맞춰서 음악을 만드는 것을 원치 않았고 자기 주관대로 작곡하기 시작했다. 작품 출판은 음악가들을 더욱 더 능동적으로 만들었고 그것으로 생계를 꾸릴 수 있었다. 베토벤의 뛰어난 음악성 덕분에 그를 후원하는 귀족들이 많았지만 그는 언제나 그들 앞에 당당했고 음악가로서의 자존심을 잃지 않았다.
지독한 가난이라는 환경적 제약도 모자라 그에게 다시금 신체적 제약이 찾아온다. 20대 후반부터 서서히 시작된 청각이상은 30대 초반에 이르러 피아노를 연주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해지고 만다. 그때 그는 마침내 유서를 쓰게 된다. ‘절망 끝에 죽음을 생각한다.’ 그러나 바로 이어 ‘하지만 예술이 나를 붙잡는다.’라고 썼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이다. 베토벤은 이런 어려움을 딛고 작곡을 하고 연주를 하지만 49세에 완전히 청력을 상실하고 만다. 하지만 그는 불행하지 않았다. 베토벤은 말했다. 인간의 소리를 잃은 대신 신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진정 신의 소리가 무엇인지 들려주고자 자신을 희생한 살신성인의 ‘악성’, 바로 ‘음악의 성인’이었다.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에 ‘영화로운 조물주의 오묘하신 솜씨’라는 노랫말이 나온다. 이것은 바로 그가 전혀 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신의 소리를 담은 그의 작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신과 음악적으로 소통했던 베토벤은 1827년 57세의 나이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죽음의 순간까지도 여전히 궁핍했고, 조카에게까지 배신을 당하고 귓병은 악화되고 결핵까지 걸렸던 베토벤. 생의 마지막까지도 운명은 그의 편이 아닌 듯 보인다. 그러나 그의 장례에는 애도를 표하려 모여든 군중의 행렬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한다.
한평생 삶에 도전하고 투쟁하며 전쟁과도 같은 예술 인생을 살다 간 위대한 음악가 베토벤. 필자는 오스트리아 유학시절 빈(Wien)의 중앙 묘지에 있는 그의 묘 앞에 언제나 싱싱한 생화가 수북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베토벤의 음악이 영원하듯 그를 향한 우리의 존경심도 영원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정승용 작곡가ㆍ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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