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기독교의 인식이 바뀌어야 할 때

인간의 인식은 한 사람의 인격이 되고 그 인격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된다. 즉, 인식에 대한 해석의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각 개인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형이상학적인 존재의 근본을 고민하게 된다. 그 고민 속에 해석의 폭은 고민자의 능력이 된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진리라는 성경을 붙들고 이 해석의 싸움을 오랫동안 해 왔다. 그 속에서 교파로 갈라지기도 하고 서로 대립하는 갈등도 있었지만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심한 갈등 속으로 쓸려 들어가 더욱 진영논리 안에 갇혀 있게 됐다. 현 정부의 반기독교 정서를 이젠 공공연히 논해도 어색하지 않게 된 것이 한 기독교 성도로서 아쉽지만 이 상황을 맞이하는 교회의 태도 또한 더욱 큰 아쉬움을 갖게 한다. 기독교는 자신들이 믿는 진리를 개인과 교회공동체들이 순수하게 신앙의 이성을 가지고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현대 교회가 바라보는 세상을 향한 해석은 교회의 이익과 안위를 먼저 바라는 전제가 깔렸음에 씁쓸한 실망감을 느끼게 된다. 천국이 매우 좋은 곳이라고 말하면서도 빨리 죽기를 싫어하는 기독도들의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지역별로 그리고 교파별로 그리고 이해관계로 나누어진 오늘의 기독교가 과연 세상 안에서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역할을 할 수는 있겠는가. 만약 그 기능이 상실 된 지가 오래되었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기독교는 구호를 만들어 내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자신들의 의로움을 선전하는 이익 단체도 아니다. 기독교가 이 땅에서 어떤 선한 일을 하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죄인의 삶의 영역 안에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믿음으로 천국 갈 사람들이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은 우리도 비신자들과 다를 것이 없는 죄를 짓는 존재임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기독교의 근본은 세상을 섬기는 것이다. 기독도 들은 세상의 죄와 싸우는 것이지 사람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성경 에베소서 6장 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되어 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으로 가르쳐진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사랑을 심고 은혜와 평강으로 축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악인일지라도 우리는 사람을 가려서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을 정치나 경제나 이익관계로 혼합하여 그것을 신앙이라고 만들어 내지 말아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하늘의 사람들이다. 이 땅의 잘못을 지적할 때도 사랑으로 해야 하고 그 지적이 나의 반성과 아픔에서 출발하여 누구 탓으로 나아가서도 안 되는 이유이다.

이제 기독교는 성경적인 해석의 눈을 가지고 바르고 정직하며 순수한 복음의 사랑으로 세상을 건강한 인식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나라의 모든 국민을 국가 공동체의 마음으로 바라보며 모든 국민이 함께 상생하며 살아낼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십자가로 짊어지셨지 그 십자가를 깎아 창을 만들어 세상을 정복하지 않으셨음을 기억하는 인식의 전환과 해석의 전환이 교회에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세상을 사는 상식과 그 위에 거룩한 믿음이 얹어져서 참 복음의 능력이 교회를 통하여 보이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 / 수지지부 FIM이슬람선교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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