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연구실에서 홀로 2학기 첫 주 강의를 녹음 녹화했다. 코로나19 상황이 생경하던 지난 3월처럼 힘들지는 않았으나 여름방학을 지나 재개한 그 작업은 다시 쉽지 않았다. 지난 학기 직전에는 십여 차례나 반복하며 진땀을 흘렸는데 이번에도 제작한 동영상이 마뜩찮기는 여전했다. 화면의 내 표정과 돋보기 너머 눈빛이 자연스럽지 못하였고 목소리가 둔탁했으며 억양도 투박하여 학생들의 청취를 촉진하기에 부족했다.
아닌 게 아니라 공간이 분리된 온라인수업에서는 표정의 함축과 목소리의 기운이 학생들과의 소통에서 대면수업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제 다시 생각하니 내가 그 작업에서 내내 어색하였던 것은 컴퓨터의 PPT 슬라이드를 마주한 나와, 목석처럼 나를 주목하는 카메라가 조성하는 무미건조한 분위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나는 한편으로 나의 부실한 강의가 가차없이 촬영되어 있고 학생들 이외의 인사들에게도 앞으로 두고두고 검증과 평가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의식하고 이런 자의식에 불편 긴장한 심정으로 콤플렉스 상태였던 것이다.
나는 나를 자못 책망하며 말의 즉발성과 채록의 기록성을 다시 인식하기로 했다. 녹음ㆍ녹화 온라인 강의가 자유로운 강의를 제약하는 일종의 구속일 수 있다고 저어하는 심사는 바로 글처럼 말이 기록되기 때문이다. 무한 반복을 보장하며 있던 그대로 그 정확한 재현이 가능한 그 기록성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말도 한번 채록되고 화자를 떠나면 그 수정이나 변경이 어렵다.
그런데 이제 어디, 대학의 온라인강의만 그러한 형편인가. 스마트폰의 촬영과 녹음 기능을 미욱하게도 뒤늦게야 떠올리며 이제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우리의 모든 말도 그런 형편에 있다고 나는 드디어 각성했다. 그런데 글은 퇴고 과정을 거쳐 수정 보완되고 그러면서 완성도가 높아지지만, 말은 아무래도 그렇게 하기가 어렵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바야흐로 자신의 의사를 성찰하며 어디서든 이런저런 말을 어떻게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좀 고민해야 할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제 그 누구의 말도 의외에도 저 삼불후(三不朽)의 하나가 될지 모른다. 서산대사의 시로 널리 알려진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가 문득 상기된다.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눈 내린 벌판을 홀로 걸을 때라도, 어지럽게 걷지 말아야 하리. 오늘 걸어간 이 발자국들, 뒤따라오는 사람들에게는 이정표가 되리니.)” 청와대 여민관 집무실 가까운 곳에 1948년 혼란한 해방정국 시기에 김구가 쓴 친필로 게시되어 있기도 한 이 시는 그러니까 이제 일국의 대통령뿐만 아니라 난언(亂言)과 부도(不道)의 말도 넘치는 이 말 많은 쟁론의 시대에서 우리가 모두 읽어야 할 시일 것이다. 그런데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는 서산대사의 시가 아니라 조선 후기의 시인 이양연(李亮淵 : 1773-1853)의 시라고 한다. 어떤 사정 어떤 이유에서건 이 시를 서산대사의 시라고 함부로 말하여 앞으로도 후인들에게 두고두고 근치하기 어려운 오류를 지속시키게 할 이는 대체 누구인가.
김승종 연성대 교수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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