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문화재단 연극이 있는 저녁 예술강좌] ③ 이재상 극단 MIR 레퍼토리 대표 연극연출가

“전국의 최초 연극 극장은 인천의 협률사”

지난 2일 이재상 극단 MIR 대표가 한국근대문학관에서 ‘연극이 있는 저녁’ 3번째 강연을 하고 있다. 이승욱기자<br>
지난 2일 이재상 극단 MIR 대표가 한국근대문학관에서 ‘연극이 있는 저녁’ 3번째 강연을 하고 있다. 이승욱기자

지금 연극의 중심은 서울 대학로다. 대학로에는 이미 여러 소극장이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연극을 보러 대학로로 몰린다. 그러나 앞서 근대 이후 연극의 중심지는 인천이었다. 최초의 연극 극장, 최초의 조선인 극장은 모두 인천에 자리를 잡았으며 이후 1980년대 소극장 시대까지 인천은 근대 연극의 태동에서 2차례의 황금기를 거쳤던 기억이 있다.

이재상 극단 ‘MIR’ 대표는 지난 2일 한국근대문학관에서 열린 ‘연극이 있는 저녁’ 예술강좌에서 인천 연극의 역사와 관련해 크게 2번의 황금기가 있다고 설명했다. 1번째 황금기는 1920년대로 인천에서 신파극 등이 공연을 하고 특히 서울의 극단도 인천에 와서 다양한 공연을 하던 시기다. 연극을 중심으로 한 문화운동도 활발했다. 이후 1930년대부터 점차 침체를 겪은 후 해방 후 전쟁을 겪으며 거의 단절됐던 인천의 연극사는 1980년대 소극장 연극시대가 도래하면서 다시 한번 부흥한다. 이후 서울에 문화 주도권을 빼앗기면서 다시 침체에 빠진 인천의 연극은 다시 황금기를 맞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펼쳐지는 장이기도 하다.

미추홀구로 자리를 옮긴 극단 돌체 모습. 작은극장 돌체 제공
미추홀구로 자리를 옮긴 극단 돌체 모습. 작은극장 돌체 제공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이 자리잡았던 인천

개항 이후 우리나라에서 극장이 최초로 들어선 곳은 인천이다. 1933년 출간한 ‘인천부사’에는 이미 1897년(명치30) 이전에 100석 규모의 극장이 있었으며 1897년 송학동으로 옮겨 극장 양식의 인천좌를 설립했다고 남겨져 있다.

이 시기 우리나라 최초의 조선인 극장으로 꼽히는 ‘협률사’도 인천에 자리잡는다. 협률사는 1895~1900년에 설립한 것으로 추정하는 극장인데, 이후 협률사는 1910년 축항사, 1920년 애관(지금의 애관극장)으로 이어진다.

이 대표는 “당초 우라나라 최초의 조선인 극장은 서울에 있었다는게 중론이어서 협률사를 제시할 때 많이 다투기도 했다”며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자료도 제시하고 그러니까 서울에서도 협률사를 인정해주고 있다”고 했다. 이어 “어찌됐든 극단의 형태가 처음 우리나라로 들어온 것은 인천을 통해서였다”고 했다.

■1910~1920년대 인천 연극의 제1황금기

인천의 연극은 일본인 극장과 조선인 극장을 중심으로 제1의 황금기를 맞이한다. 이들 극장은 당시 활동하던 혁신단, 취성좌, 신극좌, 민중극단 등 다양한 연극단체에 무대를 제공해 신파극, 신극, 소인극 등과 같은 다채로운 근대 연극의 무대로 자리한다. 특히 이 시기 인천의 연극에서는 신파극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1911년 혁신단이라는 극단이 공연한 ‘육혈포강도’는 이 시대의 대표적인 신파극이다. 이 공연은 당시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과 결합해 많은 인기를 끈다.

1920년대에는 연극을 중심으로 한 문화운동도 활발했다. 이를 주도한 것은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로 이 단체는 이후 ‘한용단’이라는 인천 대표 민족주의 청년단체로 발전한다. 이후 칠면구락부라는 인천의 연극단체로 이어지면서 인천의 연극을 주도한다.

이 대표는 “신문물이 인천을 통해서 들어오는데 고등교육기관은 서울에 많았다”며 “아무래도 인천과 서울을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 중 신문물을 받아들이고 고등교육을 배운 사람들이 인천의 연극을 주도하게 된 것 같다”고 했다.

■1980년대 소극장 전성시대

이후 1930년대와 한국전쟁, TV의 등장 등으로 침체를 겪던 인천의 연극은 1960년대 들어 동인제 연극시대가 열리면서 제2의 부흥기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재인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학생들이 1964년 만든 ‘연인회’, 1965년 만들어진 ‘극우회’ 등이 동인제 연극시대를 주도했다. 그러나 동인제 시기 연극은 아마추어 수준을 넘지 못해 연이은 해체를 맞았다.

하지만 이 같은 경험은 1970년대 후반부터 인천에 다양하 소극장이 만들어지면서 꽃피우기 시작한다. 이후 1982년 인천이 직할시로 승격하면서 인천의 연극인들은 전용소극장을 만들기 시작하는데 이 때 공연당 평균 1천명의 관객이 오기도 했다. 1980년대 초 돌체 소극장, 경동예술극장이 만들어지면서 당시 연극계를 양분했으며 이후 1980년대 후반 신포아트홀, 미추홀 소극장, 배다리 예술극장 등이 문을 열었다. 이는 1990년 전국 최초의 시립예술극단이 만들어지는 성과로도 이어진다.

하지만 이 대표는 역설적으로 시립예술극단의 창단이 소극장 전성시대의 문을 닫는 계기로 작용했다고 설명한다. 소규모 극단과 시립극단 간 막대한 제작비 차이, 약한 가격 경쟁력, 시립극단으로의 배우 쏠림 현상 등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 대표는 “당시 시립극단은 공짜로 표를 주기도 했는데 공연의 질은 좋으니 시립극단이 만들어진 후 3년 내 대부분의 소극장이 문을 닫는다”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들이 펼쳐지고 있지만 아직 그 때만큼의 활성화가 이뤄지지는 않고 있다”고 했다.

과거 애관극장 전경. 인천시 제공
과거 애관극장 전경. 인천시 제공

이승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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