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경제침탈 기념비와 친일
수원에 권업모범장 건립… 日 농업 전파
■ 농업침탈과 식민지 지주제의 강화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을 강탈하여 농업침탈을 본격화하면서 농업연구기관을 이 땅에 세웠다. 경기도 교통의 요충지이자 행정의 중심 역할을 했던 수원 서호 옆에 1906년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을 세웠다. 수원은 조선후기 정조 임금 때 농업진흥을 위한 수리(水利)시설로 만석거(萬石渠)와 축만제(祝萬堤, 西湖)가 만들어지고 국영농장의 형태인 둔전(屯田)이 대규모로 조성되어 있었다. 일제는 이러한 농업 기반 시설을 빼앗아 투자비용의 절감과 1905년 경부선 철도 부설에 따른 교통의 편의(물류운송)로 그대로 이용하고자 했다.
권업모범장의 기능은 식민지 경영을 위한 새로운 농법의 실험과 연구였다. 권업모범장은 새로운 농업기술과 품종개량 등의 영농조건을 내세워 일본농법을 조선에 이식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수원에서 일본 볍씨를 우리 농민에게 재배시켜 그 결과를 고찰하여 식민지 농업 진흥을 도모하고자 했던 것이다. 수원에서는 권업모범장을 통해 여러 종류의 일본 개량종이 일본인 지주들에게 적극적으로 보급 되었다.
또한 개량종 우선배급, 농업기술관 파견 등의 각종 편의를 제공하여 개량종 재배자에 대해 특혜를 주기도 했다. 일본 품종들은 일본인들의 입맛에 맞는 다수확 우량품종으로 상품성과 가격이 보장된 것들이었다. 이 품종들은 일본인 지주회사를 매개로하여 상품화가 확대되었고, 미곡 무역상이나 농산물 유통업자를 통하여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수원에서는 일본인 지주회사들이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일제 농업정책의 충실한 수행자였던 일본인 지주들은 1906년부터 권업모범장 주변에 대규모 농장을 설치하여 경영하기 시작했다. 1906년 국무합명회사(國武合名會社)가 수원군 남부면(南部面)에 본부를 설치했고, 1907년에는 동산농사주식회사(東山農事株式會社)가 수원군 북부면(北部面)에 설치되어 본격적인 쌀농사에 돌입했다.
그리고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의 동척농장도 설치되었다. 동척농장은 전국적 규모의 국책농장으로 수원에서 1910년부터 수원출장소를 두고 농장을 운영했다. 동척은 수원출장소 사무실을 수원역 앞에 두었는데, 창고를 만들어 수확한 벼를 적재했다가 경부선을 통하여 전량 부산으로 운반한 뒤 일본으로 반출시켰다.
■ 수리조합사업과 「수룡수리조합기념비」
일제강점기 지주를 정책적으로 성장시키며 식민지 지주제를 강화시켰던 대표적인 사업 중의 하나가 수리조합사업이었다. 1920년부터 조선총독부의 주관 하에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이 실시되었다. 조선총독부 및 각 도(道)에서는 산미증식계획의 일환인 토지개량사업의 연도별 계획을 세우고 그 실행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수리조합사업은 전통적인 농업구조를 붕괴시키고 식민지 지주제를 강화시켰다. 그 결과 중소지주층이 몰락하고 대부분의 소작농의 처지에 있던 지역민들의 삶은 더욱 열악해졌다. 일제는 전통적인 수리조직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수리조합사업을 시행했다. 일제는 수리조합사업의 추진과 운용 과정에서 강제적인 설립과 배타적이고 반관적(半官的)인 운영방식, 과중한 조합비 부담 등으로 토지겸병과 농민층 몰락을 야기 시켰다.
수원과 용인에서도 1920년대 수리조합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대표적인 수리조합사업으로 1927년 ‘수룡수리조합(水龍水利組合)’이 인가되었는데, 그 결과 여천(원천)저수지와 신대저수지 두 개의 큰 저수지가 만들어졌다. 저수지 축조 후 「수룡수리조합기념비(水龍水利組合紀念碑)」가 세워졌다.
금석문의 경우는 대개 어떠한 사업이나 인물들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지는 것이 일반적으로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기념비 역시 일제의 식민지 경제정책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비문에서 보여 지고 있는 그 찬양의 내용을 떠나 비문의 내용에 담긴 사업들이 일제가 주장하는 것처럼 시혜(施惠)적 측면으로서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다시 한 번 되짚어 볼 일이다.
일제는 자신들의 치적(治積)을 자랑하고 조선인들에게 새로운 문명(文明)을 선전하고 싶어 했다. 이러한 선전활동의 진정한 목적은 일제의 침략성과 수탈성을 숨겨 조선인의 저항을 무마하고 식민 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귀결시켜 버리는 것이었다.
「수룡수리조합기념비」에 기록된 설립자는 중옥요준(中屋堯駿, 동산농사주식회사 대표), 가등준평(加藤俊平, 동양척식주식회사 대표), 곡희치(谷羲治, 국무합명회사 대표), 홍민섭(洪敏燮), 오덕영(吳悳泳), 오성선(吳性善), 강대련(姜大蓮, 용주사 주지)이다. 평의원으로는 고목덕치(高木德治), 곡희치(谷羲治), 고광업(高光業), 김현묵(金顯), 중옥요준(中屋堯駿), 오덕영(吳悳泳), 가등준평(加藤俊平), 오성선(吳性善), 차유순(車裕舜), 양성관(梁聖寬)들로 일제강점기 수원의 대표적인 친일 지주로 알려진 차유순, 양성관 등과 친일불교에 앞장섰던 용주사 주지 강대련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일본인 지주의 성장과 「치산치수지비」
일제강점기 식민지 경제 성장을 가속하던 일본인 지주들은 식민지 지주로서의 위상과 역할을 수행해 나갔다. 이러한 모습은 1941년 세워진 「치산치수지비(治山治水之碑」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 비석은 사면비로 원수형의 비신에 2단 비좌로 되어 있다. 전면의 ‘치산치수지비’의 큰 글씨가 행서로 새겨져 있는데 당시 경기도지사였던 일본인 칸죠 요시쿠니[甘蔗義邦]가 썼다. 그리고 비문의 내용은 일본어로 쓰여 있다. 이 글은 1939년 장두병(張斗柄)이 쓰고 1941년 세웠는데, 원래 어디에 세워놓았던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931년 4월부터 시작된 사방사업(砂防事業)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광교산 일대의 삼림이 벌목으로 인하여 황폐해지자 토사가 유출되어 매년 하천 바닥이 높아짐에 따라 수로가 막히고 난류가 유발되어 홍수 피해가 잦아지자 사업을 시작하였으며, 1934년까지 4개년에 걸쳐 수원읍, 일왕면, 반월면에서 행해졌음을 알리고 있다.
‘치산치수지비’를 통해 보면 이 비석을 세우는데 참여한 기관 및 사람들은 수원군 일왕면장 광길수준(廣吉秀俊), 이석래(李奭來), 수원읍장 매원정웅(梅原靜雄), 일왕사방임시업조합장(日旺砂防林施業組合長) 이필상(李弼商), 동산농사주식회사 조선지점과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점, 윤태정(尹泰貞), 차태익(車泰益), 이봉래(李鳳來), 양근환(梁根煥)이 있다. 수원의 대지주였던 일본인 지주회사들과 조선인 관리들이 자신들의 경제적 이득을 목적으로 앞의 수리조합사업과 마찬가지로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하는 것들
우리의 지난 역사를 잠시 되돌려 보면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농업이었다. 우리가 나라를 빼앗겼던 그 시절 침략자는 농업침탈을 가속화하였고, 그 잔재들은 아직도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일제강점기 부일협력을 하며 살아갔던 친일 지주들의 과오를 묻지 못했고, 그들의 진정한 반성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변명보다는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것이 필요하다.
이젠 유형의 친일잔재들은 없앨 것이 아니라 식민지 침략을 보여주는 역사적 산물로서 남겨 정확한 역사적 고증과 그에 따른 설명,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수원박물관에서는 지난 2013년 원천저수지와 신대저수지가 광교신도시 개발로 광교호수공원으로 탈바꿈 할 때, 버려졌던 수룡수리조합기념비를 박물관 야외 전시 공간 한편으로 옮겨왔다. 그것은 두 저수지가 일제강점기 축조되었던 이유, 해방 이후 수원 시민들의 추억의 공간이 되었던 원천유원지에 대한 역사를 정확히 설명하기 위함으로 교육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식민지의 유산은 없애서 잊어버릴 것이 아니라 남겨서 보고, 분명한 역사적 진실을 후대에 알려 잘못된 것을 반성하고 각인시켜 주는데 활용해야 한다. 그것이 친일청산과 올바른 미래로 가는 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동근 수원박물관 학예연구사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