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그마한 돌섬으로 태풍이 분다. 그 태풍을 오롯이 맞으며 몸이 휘어 있는 나무와 그 앞에 앉은 소년, 그리고 조랑말 하나. 그 바람을 이길 이는 아무도 없어 보인다. 태풍은 돌섬을 때리며 노랗게 부서진다. 변시지(邊時志, 1926~2013) 작가가 1984년 그린 작품 <회상> 속 풍경이다. 제주의 삶과 풍경을 캔버스에 옮긴 작가는 7년 전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황톳빛 노란색과 거센 바람결은 이 시대에도 일렁이고 있다.
제주의 황톳빛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화풍을 일궈낸 빛의 화가 변시지가 최근 재조명되고 있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는 내달 15일까지 기획전 <변시지, 시대의 빛과 바람>을 선보인다.
변시지는 제주 서귀포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인 1931년, 가족과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미술학교 서양화과에서 그림공부를 했다. 그는 1933년 소학교 2학년 가을, 교내 씨름대회에 출전해 동급생들을 모두 제압하고 상급생과 대결하다 다리를 다치면서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마음대로 뛰어놀지 못하게 된 소년은 그림에 빠졌다. 한국작가임에도 1948년 당시 일본 최고의 중앙 화단인 ‘광풍회전(光風會展)’에서 23세의 나이로 최연소 최고상을 수상, 24세에는 광풍회의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변시지의 화풍은 크게 일본시절(1931~1957), 서울시절(1957~1975), 제주시절(1975~2013)로 분류할 수 있다. 이 중 제주시절은 서양화와 동양의 문인화 기법을 융합한 그만의 독특한 화풍이 완성됐다. 구도자처럼 그림에 몰두했던 제주시절은 성찰을 통해 세계를 해석하고 현대인의 고독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이번 전시에서는 38년간 이뤄진 그의 제주시절 회화 작품 40여 점을 만날 수 있다. 전시는 작가 변시지 고유의 색인 황토색으로 물들었다. 작가는 제주의 아열대 태양빛이 작열할 때 황토 빛으로 물든 자연광을 발견했다. 이는 작품의 바탕색이 되고 간결한 먹 선으로 화면을 채워 나간다. 소년과 지팡이를 짚고 걷는 사람, 조랑말, 까마귀와 해, 돛단배, 초가, 소나무 등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소재다. 한결같이 바람 부는 섬에 쓸쓸하게 존재하지만, 절대 무너지지는 않는다.
송정희 공간누보 대표는 평론을 통해 “그의 그림이 외롭고 쓸쓸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짓누르는 것 같지만, 위로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변시지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보편적 심상을 표현하고, 그를 극복하려는 고결한 정신성을 추구한다”고 풀이했다.
가나아트 관계자는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은 작가 자신이기도 하고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면서 “이번 전시가 심신의 위로와 그가 추구한 고결한 정신성을 찾아보는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정자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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