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빛과 소금’ 기독교 발자취를 한눈에 보다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의 설립자 한영제 장로의 아호는 ‘향산(香山)’이다. 향산은 구약성서 ‘아가서’ 4장 16절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에서 비롯되었다. 향산은 생전에 펴낸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2004) 도록 간행사에 박물관을 설립한 뜻을 이렇게 밝혔다.
“역사는 향기입니다. 오래된 서책이나 골동품을 다루다 보면 그 특유의 냄새를 맡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도 역시 향기입니다. 한반도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기독교 신앙과 역사의 향을 찾아내 그것을 오늘에 되살려 많은 사람이 그 향을 맡고 용기와 지혜를 얻도록 돕기 위해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은 설립되었습니다.”
향산은 2001년 11월, 이천시 초지리에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760㎡)을 개관했다.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유물은 18세기부터 6·25전쟁 전후까지 기독교 문화와 선교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들이다. 해방 전에 출판된 기독교 고문헌 5천여 점을 비롯하여 한국종교, 한국 민족운동 등 도서자료와 교회사 관련 사진, 작고 목회자들의 유품, 선교사 관련 마이크로필름, 성가 레코드판 등 10만여점의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기독교역사박물관은 1955년에 설립한 기독교전문출판사인 기독교문사를 뿌리로 삼고 있다. 기독교문사는 1985년에 펴낸 ‘기독교대백과사전’(전16권)으로 한국출판문화대상을 수상하고, ‘기독교대연감’을 펴낸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기독교문사 대표 한영제 장로는 ‘기독교백과사전’을 편찬하면서 한국 교회사와 일반 종교사, 민족 운동사, 향토사와 관련된 귀중한 자료를 모았다. 하나둘 사라지는 귀중한 자료를 보존해 후대에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게 된 향산은 청계천 고서점과 일본의 고서점을 다니며 관련 사료를 수집했다. 그가 수집한 자료 중에는 국내 유일한 귀중본들도 많다.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외벽에 걸린 현수막에는 “3ㆍ1운동 이후 기독교 민족운동”이라는 주제와 이승훈, 조만식, 차미리사 세 분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이승재 학예사 안내로 박물관을 둘러보며 한국 기독교의 역사와 만나는 시간은 행복했다. 박물관 마당에는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마당에 평양 대부흥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2007년에 축소 복원한 ‘평양 장대현교회’가 있다. 교회 건물이 “ㄱ”자로 지어진 배경이 흥미롭다. 1907년 당시 평양 장대현 교회 출입문도 남녀 두 개였다. 예배를 볼 때도 커튼을 쳐서 남녀를 쳐다보지 못하게 했을 만큼 당시의 문화는 고루했다. 한국 교회는 유교 문화에 길들여진 한국의 문화를 크게 변화시켰다. 그 중의 하나가 한글 사용이다.
■ 한글과 기독교
한국기독교가 한글의 발전과 보급에 끼친 공헌은 상상 이상이다. 한글은 19세기 말 기독교를 만나면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2001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린 개관기념전 주제가 ‘기독교와 한글’이다. 19세기 천주교 박해의 기록인 <척사윤음>은 한글로 쓰여진 유물이다.
한국 기독교 140년의 역사를 오롯이 품은 성경과 한글도 한몸이다. 이수정이 한글로 번역한 ‘마가의 전한 복음서 언해’는 한글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라면 기억해야할 책이다. 1882년 신사유람단 일행으로 일본 도쿄에 갔던 이수정은 기독교에 입교하고 세례를 받은 후 미국성서공회의 지원을 받아 성경번역을 시작했다. 1884년부터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기 시작한 그는 이듬해에 ‘신약 마가젼 복음서 언해’를 출판했다.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이수정이 번역한 책을 수정하여 ‘마가의 전한 복음서 언해’를 펴냈는데, 이 책의 원본이 전시되어 있다. 초창기 한국 기독교는 한글의 발전과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1896년에 창간한 순한글 독립신문을 제작하던 주시경과 벗이었던 상동교회 목사 전덕기는 한글 보급의 숨은 주역이다. 주시경은 전덕기의 주선과 후원으로 상동교회와 황성기독교청년회를 비롯한 여러 기관에서 청년학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던 것이다. 주시경이 지은 한글 문법책 ‘말의 소리’와 양계초가 지은 ‘월남망국사’를 번역한 책은 물론 전덕기가 한글로 번역한 기도서 ‘일일의력’도 전시되어 있다.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은 기독교의 한글사랑을 알려주고 있다.
■ 민족의 운명과 함께 한 한국기독교의 발자취
현관에 진열된 기왓장에는 특별한 사연이 숨어 있다. 민족시인 윤동주의 집터(연변 용정)에서 발굴한 기왓장인데, 십자가 문양이 또렷하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원이 명동촌에 큰 기와집을 지을 때 특별히 주문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박물관을 둘러보는 시간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한국기독교의 역사는 물론 한국근대사를 생생하게 알려주는 특별하고 흥미로운 유물을 자주 마주했기 때문이다. 이상재, 안창호, 윤치호가 운동장에서 나란히 서서 달릴 준비를 하고 있는 사진과 황성기독교청년회 하령회 사진은 흥미로운 역사를 알려주었다. 1910년 6월 한국 최초의 기독교 학생 여름 수양회가 열린 곳은 서울 근교의 사찰 진관사라는 사찰이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학생 46명과 연사 16명이 찍은 곳은 대웅전 앞이다. 사진 속에는 월남 이상재와 현순 같은 저명한 민족운동가의 얼굴도 찾을 수 있다.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은 매년 기획 전시회를 통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귀중한 자료를 공개해 왔다. 2001년부터 2020년 현재까지 개최한 특별전시회의 주제를 보면 소장 유물이 무엇이며 지향점이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회 ‘기독교와 한글’(2001), 2회 ‘두고 온 교회 돌아갈 고향’(2002~3), 3회 ‘한국 초대교회 신앙생활’(2003~4), 4회 ‘민족과 함께한 복음선교 120년’(2004~5), 5회 ‘한국기독교 신앙 위인 120인’(2005~6), 6회 ‘사랑의 빛, 사회봉사의 향기’(2006~7), 7회 ‘옛 사진에서 읽는 새로운 역사’(2007~8), 8회 ‘푸른 눈에 비친 백의민족’(2008~9), 9회 ‘민족과 함께한 교육선교의 발자취’(2009), 10회 ‘민족의 횃불을 든 기독여성’(2011), 11회 ‘해방 후 기독교인들의 건국 활동’(2012), 12회 ‘엽서에 실린 복음과 선교 소식’(2013), 13회 ‘사진에 실린 교육 선교의 발자취’(2014), 14회 ‘종교개혁이 연 새 세상’(2017~8), 15회 ‘경기·이천 기독교 1919’(2018~9), 16회 ‘백 년의 기억, 천년의 평화’-북한 지역 3ㆍ1운동의 역사(2019), 17회 물산장려운동 100주년 기념 ‘3ㆍ1운동 이후의 민족운동’(2020)이다.
■ 초대 기독교 정신의 회복
대한민국의 출발점이 된 3ㆍ1만세운동에 기독교인들이 조직적으로 적극 참여한 일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일제가 화성 제암리교회를 비롯해 70여개의 교회를 방화하고 파괴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1919년 당시 한국의 인구가 2천만이었는데 이중 기독교인은 20만이었다.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중 기독교인이 16인이다. 1919년 6월30일까지 교인 2천190명과 교역자 151명이 구속되었다. 일경에 체포되어 죽임당하고 지독한 고난을 겪은 투옥자의 20%가 기독교인이었던 것이다. 일제는 일찍부터 교회를 민족운동의 “소굴”로 지목했다.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조직한 신민회가 이를 잘 말해준다. 신민회 출신인 김구, 안창호, 이동휘, 이승만, 이회영, 신채호, 현순 같은 이들은 해외로 망명하여 민족운동에 전념했다. 임정 요인과 무장투쟁에 앞장섰던 독립군의 상당수도 기독교인들이다. 만세운동 이후 국내에 있던 기독교인들은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박물관은 이와 관련된 희귀한 유물과 다양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은 선교 초창기에 약자의 편에 서서 낡은 문화를 변화시키고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던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다. 기독교의 역사를 통해 한국 기독교의 방향이 어느 곳을 향해야 할지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 시작은 한국의 기독교가 초대 기독교의 정신을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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