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교사인 오 선생은 문간방을 세를 놓았다. 세입자 권씨는 보증금도 다 내지 않고 오 선생의 문간방으로 이사를 왔다. 남매를 데리고 오는데 짐이라곤 이불 보따리 하나와 취사 보따리 하나가 전부였다. 이런 와중에도 권씨는 반짝이는 구두를 바짓가랑이로 닦았다. 윤흥길 작가의 단편소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는 이렇게 시작했다.
▶권씨는 철거민 권리를 찾기 위해 시위를 벌이다 주동자로 몰려 감옥생활을 했다. 왜소했고, 내성적이었다. 그래도 대학까지 다녔다는 자존심만은 대단했다. 그는 아홉 켤레나 되는 구두를 장만, 구두닦기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구두 닦는 솜씨도 보통이 아니었다. 구두를 닦을 때면 그의 눈빛은 기쁨으로 반짝였다.
▶권씨라는 캐릭터는 1970년대 산업화와 도시화 그늘의 아이콘이었다. 권씨의 경우처럼 구두는 성별, 나이, 계층, 취향 등 뜻밖에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그에게 구두 아홉 켤레는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도시의 흔한 가장의 전형이기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월이 흘러도 가장이 짊어진 무게는 마찬가지다.
▶외신에 따르면 마리 앙투아네트의 흰색 미들힐 구두가 경매에서 4만3천750유로(약 5천760만원)에 낙찰됐다고 한다. 루이 16세의 왕비였던 그녀는 프랑스혁명으로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해야만 했다. 최근 온라인으로 진행된 경매를 통해 제법 높은 값이 매겨진 그녀의 구두는 결국 200여 년 만에 새 주인을 찾았다.
▶그녀의 구두는 염소 가죽과 실크 등으로 호화롭게 만들어졌다. 앞 코가 해지고, 여기저기 구겨졌다. 크기는 225㎜다. 오늘날 유럽의 잣대로 따지면 굽 높이는 4.7㎝라고 한다. 굽에는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이름이 오롯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당시 그녀를 시중들었던 여성이 창고에 보관하고 있다 이번에 햇빛을 본 셈이다.
▶산업화시대를 살아갔던 권씨의 구두와 혁명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사라져간 여인의 구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죽음 앞에선 철저하게 평등했던 한 인간이 신었던 신발이었다는 점은 명쾌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남아있는 역사적 체취는 날아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단순한 한 켤레의 구두에서 치열했던 당시의 사회상을 현미경처럼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래서 씁쓸하다.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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