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는 소태산 박중빈(1891~1943)에 의해 세워진 종파이다. 이 원불교가 불교인지 신종교인지에 대해 논의가 있지만, 필자는 원불교가 개혁적 불교의 성격이 강하다고 본다. 박중빈은 1924년 당시 전북 익산군에서 ‘불법연구회’라는 명칭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원불교라는 이름은 1947년 그의 제자에 의해서 제시된 것이다.
원불교의 사상에 무시선(無時禪)이라는 것이 있다. 이 무시선은 시간과 장소에 구애되지 않고 실천할 수 있는 수행법이고 또한 원불교의 사상 가운데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이 무시선의 첫 번째 특징은 불교의 계, 정, 혜를 두루 닦는다는 것이다. ‘계’는 도덕적 사항을 지키는 것이고 ‘정’은 정신을 집중해서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고, ‘혜’는 지식을 연마해서 지혜를 개발하는 것이다. 원불교에서는 이처럼 계, 정, 혜를 두루 닦는 것이 수행할 때에 상당한 효과가 있다고 주장한다.
무시선의 두 번째 특징은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는 것을 수행의 차원에서 주장한다는 점이다. 원불교의 경전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의(正義)인 줄 알거든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죽기로써 실행할 것이요, 불의(不義)인 줄 알거든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죽기로써 하지 않을 것이며, 모든 일을 할 때에 즉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말고 계속 끊임없이 노력을 할 것이다.” 이처럼 원불교의 사상에서는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도 대의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투표를 통해서 정권이 교체되는 일이 선진국처럼 이루어지고 있다. 그에 따라 사회참여를 하고자 과거 독재정권의 시절처럼 비장한 각오를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고, 비교적 수월하게 사회참여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누구나 마음먹으면 어렵지 않게 사회적 이슈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행동에 옮길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엄청난 사회적 진전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사회적 진전 속에 부작용도 동시에 나타난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내용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그에 맞추어서 사회적 의견을 내고 행동에 나선다. 이제 우리에게 요청되는 일은 단순히 사회참여만을 미덕으로 삼는 데 안주할 것이 아니고, 더 진전된 형태의 실천이다. 사회참여를 실천할 때에 자신이 주장하는 내용이 진실로 옳은 것인지 성찰할 수 있는 내면의 힘도 동시에 요구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원불교의 무시선에서 사회정의를 실천함을 수행의 차원으로 받아들인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점이다. 이는 내면의 정화를 이루어서 욕심이나 편견 등에 가려진 상태를 벗어날 때 비로소 사회참여가 의미 있음을 시사해주는 것이다. 한국사회가 한 단계 진전되려면 내면의 성숙을 모색하면서 사회참여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병욱 불교학연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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