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카페] 고전의 위안

나이를 먹을수록 후회되는 것은 알량한 독서량이다. 왜 그때 책을 많이 읽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똑똑하고 지혜롭고 현명했을 텐데. 든 게 많은 사람을 만날 때나 복잡한 문제해결이 필요할 때, 얽히고설킨 세상사가 도무지 이해 안 될 때 이런 상실감은 더욱 커진다.

그런 자괴감이 일 때마다 내가 달려간 곳은 서점이다. 시간이 넉넉지 않으면 집 근처 중고서점이라도 찾는다. 굳이 어느 코너에 몰입하지 않더라도 이리저리 서가를 배회하다 보면 ‘서권기요 문자향’이랄까, 글자의 기운과 문자의 향기가 느껴진다. 도중에 읽고 싶은 책을 발견하면 얼마나 행복한지. 어느새 쌓인 열패감은 사라지고 지적 요구로 충만해진다.

며칠 전이 그랬다. 한 서점 배회 중 나는 이 책을 ‘발견’했다. 아니 미리 입력된 기억이 무의식적으로 그걸 보도록 했다는 표현이 맞는다. 한 달 전쯤 장안을 쥐락펴락하는 논객의 도마 위에 불려나온 책,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다. 읽을 책을 고르는 게 체계적이지도 않고 관심 범위가 넓은 축에 속하는 나는 자주 여론에 선택과 판단을 의지한다. 말하자면 책 고를 때 ‘시의성’을 따지는 편. 그렇게 고른 책을 당시 현실의 사례와 연관해서 읽으면 기억도 오래가고 지루하지도 않아 좋다. 밀의 <자유론>은 그렇게 나에게 다가왔다.

부끄럽게도 고전 중의 고전이라는 <자유론>을 이제야 처음 읽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빠른 법이라던가. 161년 전 나온 책이라며 무시하고 밀쳐놨으면 천추의 한이 될 뻔했다. 정치와 사회, 인간에 관한 저자의 탁견은 시종일관했고 언어는 명징했다. 심지어 트렌디했다. “자유 가운데서도 가장 소중하고 또 유일하게 자유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거나 자유를 얻기 위한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 한, 각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자유이다.”(<자유론>, 책세상)

소위 클래식이라 하는 고전(古典)을 사전은 이렇게 푼다. “예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시대를 초월하여 높게 평가되는 문학 예술작품.” 한자 고(古) 는 글자대로 오래됐다는 뜻, 전(典) 은 모범 또는 본보기가 된다는 의미다. 그 대상은 바로 ‘오늘, 우리’다. <자유론>이 그렇듯 고전이 가치와 위안은 이런 것이다.

올해 초 팬데믹이 들이닥쳤을 때, 전 사회가 즉각적 대응방안을 찾느라 분주했다. 예술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제 와 당시를 되돌아보면 혼란의 와중에 빛난 건 여전히 고전이었던 것 같다. 특히 클래식 음악의 쓰임이 도드라졌다. 예로부터 축적된 녹음(촬영) 저장 기술의 도움 덕에 쉽게 온라인 재생이 가능했기 때문이리라. 서랍에 고이 간직한 귀한 보석처럼, 아쉬울 때 요긴한 재산 밑천처럼, 고전의 위안이란 또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정재왈 고양문화재단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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