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아침] 승상의 사당을 어디가 찾으리요

사람이 태어나서부터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각양각색의 삶을 살게 된다. 여러 삶의 길 중에 과연 어떤 것이 사람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삶(Ideal life)일까? 조선시대 우리 조상들의 큰 바램은 아들을 낳아 선조의 제사를 받들고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상적인 삶은 그림으로도 그려져 평생도(平生圖)라고 불렸다. 처음에는 특정인의 일생을 그린 것으로부터 비롯되었으나 나중에는 그 구도와 내용이 비슷해졌다. 민속박물관 등에서 볼 수 있는 평생도는 대개 여덟 장부터 열두 잘 가량의 그림으로 돌잔치, 서당공부, 혼례, 과거급제, 관직과 벼슬(유수, 판서, 정승), 은퇴, 회혼례 등이 그 내용을 이루고 있다. 치세에는 평안한 노후가 마지막 그림이나, 국난의 시기에는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는 그림이 마지막 그림이 되어야 진정한 ‘정승’이라고 기억될 것이다.

얼마 전 가평 운악산 가는 길 잣나무가 우거진 현등사 일주문 밖에서 작은 사당과 비석 세 개를 보았다. 비석의 주인공들은 태어난 해는 달라도 작고한 해는 비슷하였다. 항일순국지사 조병세(1827-1905), 최익현(1833-1906), 민영환(1861-1905)의 넋을 기리는 제단인 삼충단(三忠壇)이었다. 1905년 일제가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국권을 침탈하자 최익현은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 체포되어 대마도로 유배되고 단식투쟁으로 숨졌다. 민영환은 을사조약 폐기와 을사오적 처단을 내용으로 하는 상소를 올렸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결하였다. 암행어사, 판서, 좌의정을 지내고 가평에 은거하고 있던 조병세는 79세의 고령에 서울로 올라와 을사조약의 무효와 을사오적 처단을 주장하며 항거하다가 일본헌병에게 세 번이나 연행되며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자결하였다. 삼충단은 1910년 지역유지들이 세웠으나, 1931 왜정에 의해 사라졌고, 1988년 복원되었다고 한다.

평생도의 마지막 화폭을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장면으로 마무리한 세 충신의 비석을 보며, 두시언해에서 배웠던, 당나라 시인 두보(712-770)가 촉한 제갈량(181-234)의 사당에서 지은 촉상(蜀相)이 기억났다. “승상의 사당을 어디가 찾으리오 금관성 밖 잣나무 우거진 곳이로다 세 번 돌아봄을 어지러이 함은 천하를 위한 헤아림이요 두 조를 거친 것은 늙은 신하의 마음이라 군사를 내어 가 이기지 못하고 몸이 먼저 죽으니 길이 영웅으로 하여금 눈물이 옷깃에 가득하게 하도다.”

국난에 분골쇄신한 선열들을 생각하며, 어지러운 오늘날을 살아가는 의사로서 어떠한 길을 걷는 것이 옳은 삶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산을 내려왔다.

황건 인하대 의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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