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시의회 김형수 의장이 전하는 '사모곡(思母曲)'

“내 어머니와의 만남은 설 지난 엿새만인 추운 겨울이었다, 요즘 같으면 덜 여문 아가씨 정도였을 나이인 스무살 이었으니, 내가 어머니의 젖을 물고 컸던 기억은 여타 사람들처럼 기억날 리 없다. 그저 형하고 살던 시절 내 누이동생 둘이 살던 것만 어렴풋이 가물가물 할 뿐이다. 어느해 싸락눈이 내리는 날, 어머니와 아버지는 심한 부부 싸움을 했다. 나는 시쳇말로 6·25전쟁 같은 날이었다. 아버지가 얼마나 무서웠던지, 그 이후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다. 그날 무서움에 떨다 형과 두 누이동생과 함께 잠을 자는데 어머니가 들어오셔서 우리 얼굴을 쓰다듬은 그 손길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훗날 그 어느날 어머니는 서울생활을 하신다고 그야말로 무작정 상경했다. 이후 경희대 입구에서 도라지를 다듬어 파시는 어머니, 집이라야 남의 집 정말 초라한 어느 모퉁이집에서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처절한 삶의 싸움이었던 것 같다(형제들에게 전하는 김형수 의장의 에세이 서문).”

90세에 가까운 노모를 둔 구리시의회 김형수 의장(65). 그의 애절한 사모곡이 각박한 구리 지역사회에 심금을 울리고 있다.

7남매 중 둘째인 차남으로 태어난 김 의장은 평소 효자로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 정치에 투신해 온 긴 시간 동안, 부모님을 모시면서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그였다. 지난해 부친을 떠나 보낸 후 그 누구보다 모친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 그런 그가 설이 지난 최근, 고령의 노모를 끝내 요양원에 모셔야만 했다. 거동조차 어려워 상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지경에 달했기 때문이다.

모친을 홀로 둔 채 요양원 문턱을 나서는 그의 발길은 천근만근, 이런저런 생각에 간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마음의 짐을 도저히 덜 수가 없어 형제들에게 전하는 에세이를 써 내려갔다. 지인들 사이 아름아름 퍼지면서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는 사모곡이다.

“드디어 아버지가 면목동 가게 사장님이 되셨다. 당신 가게였지만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 하나 꺼내 잡수시지도 못하는 어머니였다. 발달장애 아들 때문에 맘 놓고 어디 한번 다니시지도 못하는 어머니, 휘경동 한인빌라를 사시고 서울을 다 차지한 것처럼 행복해 하던 어머니, 평생을 한번도 당신 맘대로 백원짜리 하나 못쓰신 어머니, 아버지 직업이 없으셨던 방학동 시절 생활비 걱정으로 노심초사하시던 어머니, 천하의 시망떡이 지금 누워 계신 곳에서 신세 한탄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중문).”

김 의장은 평생 모친이 살아왔던 가족에 대한 무한한 희생을 느낀 감정 그대로 전했다. 그리고 모친이 있어 행복했던 그 시절도 갈망했다.

“그 마음을~, 어머니 차라리 기억을 못 하시면 좋겠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를 차라리 데려가 주세요. 가슴 저 밑에서 올라오는 응어리가 있어 그래도 행복합니다. 응어리가 올라올 수 있는 어머니가 계셔서요. 어머니 고맙습니다. 이런 시간도 저한테 많지 않을 것 같아 목이 메입니다. 어머니~(끝).”

김 의장은 지금도 모친으로 긴 밤을 설칠 때가 많다. 모친을 생각하며 눈물 흘리는 날이 그리 많지 않음도 안타까워한다. 형제들 다 같이 좀 울어 봤으면 하는 맘도 없지 않다. 운들 그날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면서 말이다. 김 의장의 모친은 나와 당신, 우리 모두의 어머니였다.

구리=김동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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