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맡은 재단의 극장 규모는 대단할 정도다. 일산 아람누리에는 대극장과 콘서트홀, 소극장인 새라새극장이 있다. 덕양구에 있는 어울림누리에는 대극장과 소극장 별모래극장이 있다. 양 누리에 하나씩 있는 야외극장을 포함하면 객석 수가 엄청나다. 총 7천 석 정도다. 한 기관이 운영하는 객석 규모로 치면 전국 제일이 아닐까 싶다.
숫자와 규모를 자랑하려는 게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숫자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공간을 채우는 콘텐츠다. 콘텐츠의 질도 중요하지만, 공간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그 못지않게 양도 무시하지 못한다.
다양한 콘텐츠로 공연장을 채우는 방법은 대개 두 가지다. 하나는 활발한 기획으로 양질의 작품을 골라 연간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방식이다. 우수한 작품을 초청하거나 제작하는 경우가 여기에 속한다. 이런 프로그램 구성을 일정한 방향성을 갖고 연간 단위로 상설, 정례화하는 것을 ‘시즌제’라고 말한다. 다른 하나는 대관이다. 자체 기획 외에 외부의 기획사나 제작사 등에 공간을 빌려주는 것이다. 모든 공연장이 두 방식을 다 택하는 것은 아니다. 대관만 하는 공연장도 있는데 공공극장보다 주로 민간에 많다.
따라서 어느 공연장이 자기만의 색깔을 갖고 관객에게 어필하는 승부처는 바로 ‘기획’이다. 요새 웬만한 공연장에서는 기획 프로그램의 충실도가 공연장 브랜드에 직결된다는 생각에 시즌제를 택하고 있다. 관객들에게 시즌 개막 전 프로그램을 미리 확정하여 알려주고, 다양한 할인 패키지 상품을 내놓는 일은 시즌제의 큰 장점이다.
한국 공연장 시즌제의 종가는 어디일까? 눈에 띈 성과로 종가임을 입증한 곳은 LG아트센터이다. 2000년 문을 열면서 시즌제를 선보인 LG아트센터는 이를 통해 개관 초기 명실상부한 최고 공연장의 이미지를 굳혔다. 이후 여러 극장이 앞서거니 뒤를 따랐고, 우리 재단도 지난해부터 ‘아트시그널!고양’이라는 이름의 시즌제를 내세웠다. 개막 직후 터진 코로나19로 그 진가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해 아쉬웠지만, 곧 4월 시즌을 활짝 열면서 고양발 아트시그널을 발신한다.
나는 공연장을 미디어로 본다. 공연장은 공급자와 수용자를 연결하는 매개체이며, 그 공연장의 프로그램은 중요한 메시지다. 기획자의 정성이 담긴 프로그램 하나하나가 그 공연장의 품격과 성격을 담은 메시지라는 이야기다. 시즌제는 개별 메시지의 묶음이다. 시즌제의 평판과 역사가 쌓여 공연장은 견고한 미디어이자 브랜드가 된다.
코로나19 상황이 지속되면서 모든 공연장이 생존 방식을 놓고 고민이 깊다. 이런 때 의기소침하지 않고 오히려 공격적으로 공연장의 브랜드 가치를 높여가는 곳이 있다. 2018년 인천 송도에 문을 연 ‘아트센터인천’의 활약이 돋보인다. 최근 시즌 프로그램을 보면, 정통 클래식 콘서트홀의 특성을 살려 오로지 프로그램의 질로서 정체성을 다지는 노력이 잘 드러난다. 바다에 연한 아름다운 입지는 음악당의 또 다른 매력 중 하나다. 이렇듯 가보고 싶은 요소가 많은 공연장은 그만큼 성공 가능성도 크다.
정재왈 고양문화재단 대표이사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