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A군에게

몇 주 전, 충분한 시간은 아니었지만, 자네의 고민을 나누어 준 것에 감사하네. 자네가 넘을 수 없는 현실의 험난한 벽이 내 근처에 가깝게 스며들고 있음을 실감하는 시간이었네.

경쟁을 뚫고 명문음대에 진학하기까지 자네가 쏟아낸 땀은 어떤 분야보다 진했던 것을 알고 있네. 한 두 평의 좁은 연습실이 자네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공간이었지. 혹독한 연습으로 손가락에 피가 맺히고 터지는 맹렬함을 키워온 자네의 기량이 자랑스럽네.

대학졸업 후, 유학생활은 자네의 젊은 에너지를 맘껏 발산한 시간이었지. 낯선 이국 땅에서 연습실 확보를 위해 잠을 설치며 새벽을 기다려 확보한 연습실에서 다음 날 새벽 2시까지 수위에게 쫓겨나온 날들이 1년에 360일은 넘었지. 고향의 부모님을 생각하며 향수에 젖어 있던 시간도 이제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지만, 당시에는 넓은 바다에 홀로 남겨진 느낌이었겠지? 퇴임을 앞둔 아버지가 어렵게 마련한 시골의 작은 아파트를 팔고 퇴직연금도 해지하여 유학자금을 보내주신 가족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컸기에 그 흔한 햄버거 하나도 마음 놓고 먹을 수 없었겠지. 그때의 눈물은 그리움과 서러움이 만들어낸 한 편의 시가 되어 이제 가슴에 담아 두었겠지.

A군, 한국에서의 16년 학업생활 그리고 7년여의 유학생활 거의 25여 년의 청춘을 악기에 매달려 온 것은 음악 없이 살아가는 것이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 가장 큰 요인이며 이런 수련과정을 거치면 스승과 선배들이 누리는 윤택한 보상이 따라온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겠지?

유학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는 왜 이리 더딘지 혹시 하늘에 멈춰 있는 것은 아닌가 창밖을 내다보며 비행기 안에서 뛰고 싶던 심정이었지.

금의환향, 꿈에 그리던 고향에 도착하였지만 안정된 생계를 보장하며 자네를 환영하는 단체는 없고 그나마 유일한 생활의 보루인 프리랜서 활동도 우환 코로나로 꽉 막혀버려 신세 진 분들께 면목이 없어 최근에는 연락도 제대로 못 하고 있겠지.

A군, 자네가 남기고 간 고민의 숙제를 떠올리며 기성세대가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고민하고 있네. 무능함, 미안함, 부끄러움, 동정 등 뒤섞인 한탄의 진동이 조석으로 나를 흔들고 있네. 30여 년 전, 전문연주자의 길에 뛰어든 나와 현재 자네가 마주하는 현실의 차이는 크지 않네. 30여 년간의 학생생활을 통해 착실하게 준비된 나에게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이 사회는 적절한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지. 솔직히, 환갑이 넘은 오늘도 연주자로서 나를 알리기 위한 프로모션을 하루도 게을리한 적이 없네. 예술가, 특히 연주자로 살아가는 길은 평생을 험하고 거친 광야를 지나는 수도자와 같은 것일세. 세상이 내 편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 나를 강하게 채찍질한 것은 ‘열정’이었네. 열정은 남이 거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샘에서 만들어져 분출되는 것이네.

열정은 긴 숨으로 참고 견디는 인내가 있어야 오래도록 꽃 피울 수 있네. 덧붙이면, 노력은 진정한 나의 실력을 발굴해 내는 열정의 핵심적인 부분일세. 이 고난의 흐름을 새로운 자기발전의 시간으로 만드는 지혜를 기대하고 싶네.

그때 새벽공기를 헤치고 연습실에 들어서며 뜨겁고 떨리는 가슴으로 악기를 보듬던 감격의 추억을 다시 꺼내 주기 바라네. 지금 겪는 고통의 시간이 견고한 창조의 시간으로 변환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네. 예술의 진가를 깊고 넓게 발굴하여 이전보다 더 존경받는 연주자가 되기를 바라면서 이만 줄이네.

함신익 심포니 송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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