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의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였고 아들에게 돈벌이를 시키려고 11세때부터 생계형 연주를 시켰다. 베토벤의 어머니 마리아 막달레나 케베리히는 이런 남편으로부터 아들을 지키기 위해 희생과 헌신으로 감싸주었다. 베토벤이 인류역사에 가장 훌륭한 음악가가 된 것은 어머니의 사랑 때문이었다.
22살의 모차르트는 소년 시절 천재로 인정받고 대성공을 거둔 파리에서의 화려한 복귀를 꿈꾸며 어머니 안나 마리아와 함께 파리로 향한다. 어머니는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고 아들의 성공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러나 파리에서 성인이 된 모차르트를 환영하는 곳은 없었다. 빛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파리의 남루한 호텔방에서 아들은 허기에 지친 어머니를 하늘에 보낸다.
어머니는 위로의 손길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최후의 피난처이다.
내게도 그런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의 손길을 구체적으로 떠 올리고자 창가를 자주 바라보지만, 그 많은 사랑의 순간들을 기억해 내기는 쉽지 않다. 사랑받음이 일상생활에 스며들어 특별한 것이 아닌 보편화 되었기 때문이다.
막내인 나의 손을 잡고 시장을 가던 어머니의 따뜻한 손을 기억한다. 동네시장에서 콩나물 한 움큼 사서 여섯 식구가 국 끓여 먹던 시절이다.
미아리고개 넘어 삼양동 달동네에서 피아노교습소를 찾아 1시간 이상 걸어다니며 피아노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골짜기에서 우수하다고 소문난 선생님을 찾아 헤매던 어머니 덕분이었다. 첫 레슨시간에 어머니손을 잡고 산동네 길을 내려오던 1960년대의 삼양동은 익숙했던 옆집이 무허가 건물로 철거되어 하루 만에 없어지던 시절이다.
새 학년이 되면 작성하는 가족신상란에 부모님의 학력을 적는 칸이 있었다. 어머님의 학력이 국졸 (초등학교 졸업) 또는 국퇴 (초등학교 중퇴) 인지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그래도 국졸이라고 쓰는 편이 조금 나아 보여 그렇게 쓰곤 했다. 어머니가 중학교도 나오지 않은 것이 부끄러웠다.
나의 어머니는 50세에 중풍으로 쓰러진 후 기적적으로 몇 개월 후에 일어났지만, 반신불수로 평생을 살아야 했다. 한쪽 몸이 점점 기울어지는 상태로 88세까지 사시면서 하루도 재활을 게을리하신 적이 없다. 불구의 몸을 철저한 관리와 운동으로 극복하시고 모든 생활을 정상적으로 하신 위대한 챔피언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어머니가 쓰러지시던 그해, 나는 군대에 입대하였다. 겉으로는 많이 울었지만 우환이 있는 집안을 떠나는 것이 조금은 다행스러웠다.
제대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또 다른 피신이었다. 가족들이 유학에 반대는 하지 않았지만 적극적인 찬성을 하는 사람은 오직 어머니뿐이었다. 유학비용을 염려한 가족들의 판단을 뛰어넘는 무학력 어머님의 선택은 위대하였다 “가라우, 우리 신익이래 뭐든 할 수 있지 안카써?” 피난민들이 모여 사는 판자촌 개척교회 목회자의 아내로 빈궁함 속에 여섯 식구의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큰 숙제인 달동네의 가난과 헐벗음에서 훌쩍 떠나고 싶었던 적도 많았을 것이다. 나를 품에 안아 주시던 어머님을 내가 성인이 된 후 꼭 껴안고 하룻밤도 지내지 못한 불효자이다. 어머니가 위급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하여 어머니의 손을 잡았으나 그 손은 차가웠다. 오늘도 어머니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을 기억한다. 그리고 나를 향한 그 사랑의 눈길을 잊지 못한다. 어머니는 내 음악의 본질이다. 어머니의 사랑과 그리움이 내 음악을 존재하게 한다. 그리고 그런 사랑은 어디서도 다시 찾을 수 없다.
함신익 심포니송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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