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디로부터 왔고, 이 세상은 언제 어떻게 있게 된 것인가?’ 인간만이 근원을 묻는다. 근원에 접근하는 많은 이야기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계속 근원을 묻는 것이다. 존재하는 어떤 것도 원인 없는 것은 없다. 예를 들어, 나의 원인은 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다. 그런데 나의 엄마와 아버지도 그들 각자의 엄마와 아버지와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이다. 그 원인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끝이 없을 것이다. 그 위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이 무한히 계속된다. 그런데 이때 무한소급의 문제가 생긴다.
둘째, 제1근원을 설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대한국인들은 단군을 그들의 공통조상으로 삼고 단군의 할아버지를 하느님으로 설정하여 제1근원을 설정한 이야기를 만들었다. 또 그리스인들은 세계의 존재 근거를 설명하기 위해 제1원인을 가정한다든지 선의 이데아를 만들었다.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을 만들어 태초에 세계를 창조했다고 믿었다. 또 현대과학에서는 빅뱅이론을 만들어 우주 발생의 처음을 빅뱅으로 설정했다. 그러나 단군의 할아버지인 하느님은 어떻게 해서 있는 것인지를 설명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은 우주를 창조한 그들의 신이 어떻게 해서 있는 것인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도 선의 이데아나 제1원인이 어떻게 있게 되는지 설명할 수 없다. 현대과학자들도 우주발생의 출발점인 빅뱅의 에너지는 어떻게 있게 되는 것인지 설명할 수 없다. 무한소급을 끊는 이런 제일 첫 번째를 설정하는 것도 독단적이란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셋째, 제1근원을 마지막 결과와 맞물리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불교에서는 무명(無明)으로부터 노사(老死)까지 12가지의 연기(緣起) 고리를 설정하고 그것이 순환하는 것으로 이 세계 존재의 실상을 설명한다. 이는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와 같이 전체적으로 순환한다고만 설명하는 것이다. 이는 순환에 빠지는 설명일 뿐으로 제대로 된 설명이 될 수 없다. 20세기 독일 철학자 알베르트는 근원이나 근거를 설명하는 이 같은 세 가지 방식에 모두 문제가 있다고 하며 트릴레마로 불렀다. 세 번째 순환에 빠지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불교에서는 조건들이 만나 사건이 일어나며 현상 세계가 이뤄진다고 설명한다. 현상 세계가 생겨나는 조건의 고리를 역으로 끊어나가면 결국에 모든 고리가 끊어진다. 이것이 바로 무아(無我)에로의 해탈(解脫)이자 니르바나를 이뤄 순환을 벗어나는 것이다. 두 번째 독단에 빠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제1근원에 대한 깊은 믿음으로, 세상과 자신을 그것에 전적으로 내맡겨야 한다.
그러면 스스로는 텅 비어 제1근원을 잊게 되며, 세계는 신의 섭리대로 돌아간다. 첫 번째 무한소급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다른 차원의 문제로 전환하길 제안한다. 사과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사과가 무엇인지 묻는 대신 사과를 먹는 것이 사과를 아는 지름길이다. 근원 묻기를 멈추고, 그때 거기에서 할 일을 그저 하면서, 삶의 근원을 맛보며 사는 것이다.
김원명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교수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