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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싸리꽃 핀 벌판
문화 시 읽어주는 남자

[시 읽어주는 남자] 싸리꽃 핀 벌판

싸리꽃 핀 벌판

          -김수영

 

피로는 도회뿐만 아니라 시골에도 있다

푸른 연못을 넘쳐흐르는 장마통의

싸리꽃 핀 벌판에서

나는 왜 이다지도 피로에 집착하고 있는가

기적소리는 문명의 밑바닥을 가고

형이상학은 돈지갑처럼

나의 머리 위에서 떨어진다

《김수영 전집》, 민음사, 2018.

 

현대사회, 물질에 소진된 인간

왜 피로한가? 이 질문은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복잡하다. 원하는 사람은 없지만 피할 수 없는 게 피로다. 피로의 원인은 심신의 과도한 사용에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불가피하다. 노동하지 않으면 먹고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간에 노동은 인간의 기력을 소진하게 한다. 일하지 않는 소수 계층도 피로를 호소하는데, 그들의 피로는 육체적 노동에 따른 피로라기보다 신경증 또는 권태의 산물로 보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피로는 계급적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피로하면 언제든 쉴 수 있는 사람과 피로해도 쉴 수 없는 사람으로 나뉜 사회가 자본주의다. 전자의 계층이 느끼는 피로는 일시적이고 해소할 수 있는 상태이겠지만 후자의 계층이 느끼는 피로는 만성적이고 해소 불가능한 운명과도 같다. 그래서 대다수 사람에게 피로하면 쉬라는 말은 빈말처럼 들린다. 결국 자본주의에서 왜 피로한가? 라는 물음은 해결책이 없는 물음과도 같아 보인다.

김수영 시인의 시 ?싸리꽃 핀 벌판?의 첫 구절에 피로는 도시뿐만 아니라 시골에도 있다는 진술은 어디를 가든 피로의 상태를 피할 수 없다는 인식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장마통의 싸리꽃 핀 벌판의 풍경을 감상하지 못하고 “나는 왜 이다지도 피로에 집착하고 있는가”라고 반문하는 시인의 불편한 심경은 현대인 모두가 느끼는 공통의 감정일 것이다. 휴식을 취하면서도 피로를 느끼는 이유는 한마디로 ‘돈’ 때문이다. 돈은 피로의 산물이다. 안 벌어도 피로하고, 벌어도 피로한 게 돈이다. 돈은 모든 가치를 집어삼키는 블랙홀이다. 김수영 시인은 집착하고 싶지 않지만 집착할 수밖에 없는 게 돈이라는 사실을 “형이상학은 돈지갑처럼/나의 머리 위에서 떨어진다”라는 표현을 통해 솔직히 드러낸다. 형이상학이 돈지갑처럼 떨어진다는 표현은 한국 현대시의 흐름에 한 획을 긋는 엄청난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 표현이 전하는 메시지는 돈에 집착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는 사람만이 돈이 주는 피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돈에 대해 초연한 척하는 사람은 대개가 위선적이다. 돈에 대해 솔직하다는 게 최선의 윤리는 아니다. 그러나 솔직하지 않으면 돈의 노예가 되어 삶을 소진하게 된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는 “소진된 인간은 피로한 인간을 훨씬 넘어선다.”라고 말했다. 소진은 회복할 수 없는 상실이고 죽음이다.

신종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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