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시티 수원] 日 만행 알린 안점순 할머니…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14세 때 끌려가 지옥 같은 삶… 광복 후 우여곡절 끝에 고향으로
지원단체 끊임없는 응원에 70세 넘어서야 마음 열고 역사 증언
평화·인권활동 市에 큰 울림… 독일에 ‘평화의 소녀상 순이’ 건립
할머니 마지막 길 시민사회장으로… ‘용담 안점순 기억의 방’ 조성

2014년 5월3일 올림픽공원에서 개최된 수원평화비 제막식에 참석한 안점순 할머니(가장 왼쪽)와 염태영 수원시장(앞줄 왼쪽 네 번째) 등 관계자들이 막을 걷어내고 있다.

■ 방앗간 앞에서 시작된 악몽의 시간

안점순 할머니의 원래 이름은 순이였다. 순이는 일제의 핍박이 극심하던 1928년 겨울 서울 마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셔서 순이 가족은 형편이 좋지 못했다. 삼 남매를 키우기 위해 헌신하는 어머니를 돕기 위해 순이는 효심 깊은 소녀로 자랐다.

불행은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마포 복사골 큰 방앗간 앞으로 몇 살부터 몇 살까지의 여자아이들은 다 모이라’는 방송이 울려 퍼진 어느 날, 순이는 엄마 손을 잡고 방앗간 앞으로 갔다. 오라면 가야 하는 시절이었다.

쌀가마를 재는 저울에 여성들이 한 명씩 올라섰다. 그 중 어느 정도 몸무게가 나가는 여성들은 영문도 모른 채 트럭에 올라타야 했다. 또래보다 덩치가 좋아 50㎏을 넘겼던 순이도 트럭에 실렸다. 순이는 겨우 열네 살이었다.

트럭은 여러 번 어딘가에서 멈춰 여성들을 더 태웠다. 여성들은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중국 베이징으로, 톈진으로 이동해 어딘지 분간조차 어려운 곳으로 끌려갔다.

산도 없고, 나무도 없고, 누런 모래가 뒤덮인 사막 같은 곳 가운데 덩그러니 집이 있었다. 그곳에서 고통스러운 생활이 시작됐다. 일본 군인들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칼로 위협하기도 했다. 지옥 같은 생활은 3년 넘게 계속됐다.

전쟁이 끝나자 일본 군인들은 여성들을 버리고 도망쳤다. 중국군과 러시아군이 쳐들어와 무차별 공격을 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방법도 모르는 순이는 무작정 걸었다. 며칠이 지나 어렵사리 베이징에 도착한 순이는 우연히 광복군을 만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집에서 허드렛일을 도우며 8개월 정도 피폐해진 몸과 마음을 추스른 순이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귀국선 소식을 듣고 톈진에서 배를 타고 인천에 도착했다.

꿈에 그리던 복사골 집으로 걸어가는 길, 순이는 떡시루를 머리에 이고 걸어오는 어머니와 마주쳤다. 생사를 넘나들며 집에 돌아온 순이와 어머니는 부둥켜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2017년 12월13일 시민사회단체가 열어드린 구순연에서 안점순 할머니와 염태영 수원시장이 손을 맞잡고 활짝 웃고 있다.

■ ‘안점순’ 이름으로 세상에 서다

순이가 ‘안점순’이라는 자신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수십 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집에 돌아온 후 석 달을 앓아누웠던 순이는 남자라면 진저리가 나 결혼은 생각하기 싫었다. 그러다 또다시 전쟁이 발생했고, 피난 생활을 하며 생계를 위해 빨래와 식당일 등을 가리지 않았다. 대구부터 강원도까지 옮겨 다니다 30대 초반부터 식당을 운영하며 고된 삶을 이어갔다.

가족들은 순이에게 큰 힘이 됐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처음으로 위안부 문제를 세상에 공개하고 2년이 흐른 1993년 8월, 막내 조카가 안점순을 피해자로 신고하고 피해자생활안정지원법 대상자로 등록했다.

수원에 살고 있던 조카의 권유로 수원으로 온 뒤에도 위안부 피해는 언급하고 싶지 않았고, 조용히 지냈다. 마음을 열기 위해 피해자 지원단체가 끊임없이 노력했고, 75세가 된 순이는 2002년 드디어 마음을 열고 ‘안점순’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다.

다른 피해자들을 만나 서로 보듬은 안점순 할머니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일본대사관 앞 수요시위에 참석했다. 일본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UN 인권위원회 여성폭력문제특별보고관에게 진정서를 제출하고, ILO(국제노동기구)의 국제심포지엄에도 참여해 자신의 경험을 쏟아냈다. 2015년 한일합의 무효를 외치며 위로금 수령을 거부하기도 했다.

안점순 할머니가 2017년 3월8일 독일 레겐스부르크 비젠트 네팔 히말라야 파비용 공원에 설치된 평의 소녀상을 쓰다듬고 있다.
안점순 할머니가 2017년 3월8일 독일 레겐스부르크 비젠트 네팔 히말라야 파비용 공원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을 쓰다듬고 있다.

■ 안점순 할머니와 수원평화나비, 수원시의 ‘동행’

안점순 할머니의 활동은 수원지역사회에 큰 울림을 줬다. 2014년 3월 수원에서 평화비를 건립하기 위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이 시작돼 건립기금 7천여만원이 모였다. 수원시청 맞은편 올림픽공원에 건립된 수원평화비를 계기로 ‘수원평화나비’가 창립, 피해자의 인권회복과 매월 수요집회를 주관했다.

이후 안점순 할머니와 수원평화나비, 수원시는 유럽 최초의 평화비 건립을 위해 의기투합했다. 2016년 독일 프라이부르크시와 자매결연을 맺은 수원시가 소녀상 건립을 제안했고, 74개 시민단체와 함께 건립추진위원회를 결성해 시민 모금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의 조직적인 방해로 프라이부르크 소녀상은 결국 무산됐다.

수원시와 수원시민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독일 현지에서 독일추진위가 결성돼 힘을 보태면서 수원시민들의 정성으로 만들어진 평화의 소녀상은 독일 중남부 레겐스부르크 인근 네팔 히말라야 파비용 공원에 자리할 수 있게 됐다. 안점순 할머니는 지난 2017년 3월8일(현지 시각) 독일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에 참석했고 소녀상은 ‘순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2018년 3월30일 수원시민사회장으로 치러진 안점순 할머니 장례식에 또다른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조문하고 있다.

안점순 할머니는 다음해 3월30일 삶을 마감했다. 수원시는 할머니의 장례를 수원시민사회장으로 치러 할머니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이후 수원시와 수원평화나비는 올해 안점순 할머니를 기리는 ‘용담 안점순 기억의 방’을 만들었다. 수원시가족여성회관에 추모 공간 및 기림비를 만들어 피해자의 허물을 벗고 여성운동가이자 인권운동가, 평화운동가로 다시 태어난 안점순 할머니의 뜻에 따라 일본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아내는 데 일조하기 위해서다.

안점순 할머니 생전 모습.

안점순 할머니의 바람은 단 하나였다.

“이제라도 사죄 한마디 하면 끝날 일인데, 억만금을 준들 청춘이 돌아오겠어? 그 사과를 듣고 싶다 이거지” 

나쁜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8월1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국내외에 알리고, 피해자들을 기리기 위한 국가기념일이다.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피해를 증언한 날을 기념해 정해졌다. 수원시에도 위안부 피해자가 살고 있었다. 끔찍했던 기억을 꺼내 평화와 인권을 설파하는 활동가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故 안점순(1928~2018) 할머니다. 일본의 만행을 알려 다시는 전쟁과 핍박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던 할머니는 일본으로부터 직접적인 사과를 듣지 못한 채 영면했다.

이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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