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福音)은 ‘유앙겔리온’이라는 그리스어 를 번역한 표현이다. 이 단어는 그리스도인 혹은 그리스도교 문화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리스도교 저자들은 자신의 저작에서 ‘유앙겔리온’, 곧 ‘복음’이란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마르 1,14-15 참조) 혹은 사도들이 선포한 예수 그리스도(1코린 15,3-5)와 관련 있다.
예수는 2000년 전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에 도래하였음을 선포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 당하고, 사흗날에 부활한 이후 사도들은 부활 사건의 증인이 됐다. 그들은 나자렛 사람 예수를 통해 하느님 나라가 완성됐다는 것과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했다는 것을 전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역사적 사건이자 하느님의 약속이 기록된 성경 말씀을 실현한 구원사건이라고 고백했다(1코린 15,1-8 참조).
이렇듯 ‘유앙겔리온’이란 단어는 그리스도교적 색채로 깊게 물들어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창작물이라고 볼 수 없다. 이 단어는 이미 1세기 그리스-로마 문화권 안에서 널리 알려진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사용된 ‘복음’은 황제들과 관련된 사건과 깊이 연관된다. 특별히 황제의 생애 가운데 중요한 사건들, 예를 들면 황제의 탄생이나 즉위식, 황제 추대나 성년식을 알리기 위해 ‘복음’이란 용어가 사용됐다. 또한 황제가 전쟁에서 승리한 소식은 ‘복음’이었다.
이렇듯 당시 한 지역이나 도시가 번영하고 평화롭기 위해 황제의 안녕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소아시아 프리네에서 발견된 한 비문(기원전 9년)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탄생일을 ‘복음’, 곧 ‘기쁜 소식’의 시작으로 선포했다. 신약성경에서 등장하는 ‘복음’이라는 용어는 황제들에 관한 ‘기쁜 소식’을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비판적으로 검토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오늘 우리는 코로나19가 흔들어 놓은 혼란의 상황 속에서 ‘복음’을 기다리고 있다. 코로나19의 위협과 공포로부터, 그리고 언제 일상을 회복할지 모르는 막연함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가까운 아시아의 국가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복음’을 기다리는 이들이 많다. 이슬람 무장세력 탈레반의 장악으로 여성들은 자신의 인권을 유린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떨고 있다. 미얀마 국민도 ‘복음’을 원한다. 군사정부의 쿠데타로 이미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권력에 눈이 먼 이들이 빼앗아간 자유와 평화를 미얀마 국민은 되찾기를 원하고 있다.
과거 로마 황제의 ‘복음’은 국가와 도시의 번영과 안녕을 보장했고, 예수의 ‘복음’은 죄로부터의 해방, 곧 구원을 선사했다. 지금 우리는 ‘복음’을 원한다.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상 속에서 공포와 두려움을 벗어버리고 ‘사람답게’ 살아가고 싶다. 우리는 그러한 세상에서 살아갈 ‘기쁜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정진만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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