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일린의 작품세계 오롯이 간직한 ‘보물창고’
1전시실 ‘아트린의 가을’전… 강복경 등 서양화가 9인의 작품전
미술관 2층 상설전시관 2전시실, 배 관장의 작품 ‘빛과 어둠’전
3전시실, ‘향원익청’전·‘티벳탱화의 재해석’전 눈길 사로잡아
코로나 잦아들면 문화예술교육·음악회 등 열린미술관 부푼꿈
올망졸망한 산들이 미술관을 감싸고 있는 풍경이 여유롭다. 국화 화분이 늘어선 잔디밭에 불쑥 솟은 한 무더기의 빨간 맨드라미가 파란 하늘빛과 어울려 초가을의 정취를 더해준다. 파주시 광탄면 기산리 고령산 앵무봉 자락에 자리 잡은 아트린뮤지움(관장 배일린)은 현대미술 중심의 제1종 등록미술관이다. 미술관 바깥 풍경에 취해 있을 때 주영희 학예연구사가 다가와 인사를 건네며 카페로 안내한다. 커피를 마시며 배일린 관장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신촌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며 소마미술관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던 배일린 작가는 “나만의 미술관을 갖고 싶어서” 여러 곳을 찾아다니다가 기산미술관을 인수하고 남편 손대업 대표와 함께 1여년 동안 리모델링하여 지난해 1월에 ‘아트린뮤지움’을 개관한다. 미술관 이름에 들어 있는 ‘린(麟)’은 배 관장의 이름이다.
■ ‘아트린의 가을’전, 가을에 봄날을 추억하다
1전시실은 매달 새로운 전시가 열리는 공간으로 ‘아트린의 가을’전이 열리고 있다. 2021 지역문화예술플랫폼 육성사업으로 기획한 이번 전시는 지난 15일까지 한국화가 5인의 작품을 전시했고, 16일부터 강복경, 김영숙을 비롯한 서양화가 9인의 작품을 이달 말까지 전시한다. 활짝 핀 노랑민들레꽃을 찾은 나비 한 쌍을 그린 ‘봄의 대화’(경도연), 작약꽃봉오리에 맺힌 빗방울을 생동감 있게 표현한 ‘여우비’(김효순), 들판을 붉게 물들인 ‘양귀비 피는 오월’(박종순), 햇살이 눈부신 바다를 표현한 ‘가고 싶다’(양옥련), 푸르른 들녘을 그린 ‘바람의 향기-청보리밭’(서영란), 자연이 빗은 신비의 땅 ‘그랜드 캐년’(정을순), 연두와 초록이 어우러진 ‘오솔길 저 너머’(최운숙)도 계절이 봄이다.
씨 뿌린 봄을 기억하며 갈무리를 잘하란 메시지일까? 작가들은 대부분 파주지역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다. 상반기에 진행한 전시 목록을 살펴본다. 최은숙의 ‘그리운 풍경 공감하기’(1월)를 시작으로 김영애의 ‘솔향기 속으로’(2월), 한진영의 ‘스프링 메디테이션’(3월), 남윤희·유종구·유혜정·이옥진의 ‘민화! 향기를 입히다’(4월), 고성익·김률희·김명자·이형민·정인완의 ‘감응을 통한 인간성 회복과 치유-5인5색전(5월), 이윤영의 ‘탈피 molting’(6월), 박윤경의 ‘스트로마톨라이트’(7월), 김한연의 ‘캔버스에 그려보는 또 다른 삶’(8월)이 이어졌다. 매달 새로운 작품을 전시하기에도 벅찰 터인데, 9월과 10월에는 성인을 대상으로 자화상 그리기를, 어린이를 대상으로 자연화 그리기를 가르치는 ‘나도 화가다’라는 프로그램을 동시에 진행한다.
■ 티베트 탱화, 먹과 메탈로 인간 내면에 깃든 빛을 이끌어내다
20년 전 티베트 불화에 마음을 빼앗긴 배일린 작가는 죽음을 깊이 응시한다. 죽음을 경험할 수는 없으므로 ‘티벳 사자의 서’를 비롯한 관련 서적을 통해 죽음을 공부하고 죽음을 묵상하며 죽음을 해석한다. 사람이 죽지 않으면 이 세상은 정리가 되지 않고 발전할 수가 없다. 죽음이 곧 ‘진화’라는 깨달음을 얻은 배 작가는 이러한 철학을 가지고 10년 동안 티베트 탱화 제작에 몰두한다. ‘십이지신상’을 비롯해 그동안 그린 작품으로 프랑스 깐느 페어, 뭄바이 비엔날레 초대 작가로 참여했다.
미술관 2층은 배일린 관장의 작품을 오롯이 만날 수 있는 상설전시관이다. ‘빛과 어둠’전의 2전시실, ‘향원익청’(香遠益淸)전과 ‘티벳탱화의 재해석’전이 열리는 3전시실은 2000년 이후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작가는 ‘빛과 어둠’이라는 양면을 가진 인간 생명력의 아름다움을 먹과 메탈로 표현한다. 짙은 먹 바탕에 반짝이는 유선형의 철 조각 메탈이 나란히, 때로는 나선형으로 배열되어 있다. 가까이서 살펴보니 조각들이 모두 사람의 형상이다. “이것은 ‘당신은 몇 번째 서 있습니까?’라는 작품이다. 삶과 죽음, 살아가면서 겪는 여러 가지 감정들이 화면이 담겨 있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화하는 생명의 특성을 빛으로 표현한 것이다.” 배 관장의 설명을 듣고 다시 살펴보니 종이 바탕이 쭈글쭈글하게 구겨져 있다. 삶의 고난과 마음의 고통을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경계에 서다’란 작품이다.
빛이 어둠을 몰아낼 수 있고, 어둠이 빛을 잠식할 수도 있지 않는가?” 향원익청관에서 만나는 연꽃들은 생명력이 넘친다. 잎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웅크린 여성이 보인다! 그림의 바탕을 장식하는 화려한 색채는 작품의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티베트 불화-탱화에 얽힌 사연에 빠져든다. “1999년 뉴욕에서 전시했는데, 수묵화를 들고 갔다. 관람하던 미국인이 ‘당신 그림은 중국풍 그림이 아니냐?’고 물었다. 머리를 세게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관람객의 눈에 중국풍 그림으로 비치는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과연 작가생활은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며, 국제적으로 경쟁력을 가진 작가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인가 회의하며 방법을 모색하다가 티베트를 여행하게 된다.
티베트에서 탱화를 보고 해답을 얻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그려야 할 그림이다!’라는 확신, 앞으로 동양의 종교화가 세계 미술의 새로운 역사를 쓸 것이란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탱화의 정석에서 보살은 이타행(利他行)을 실천하는 존재다. 보살은 베풂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보살은 무엇일까? 최고의 가치는 ‘공감’이 아닐까. 공감은 상대의 마음이 움직여서 아픈 상처를 딛고 다시 일어설 힘을 준다.” 우리 시대의 보살은 공감이라는 말이 신선하다.
작업실 옆에 붙은 4전시실은 초기 작품을 살펴볼 수 있는 ‘동양화’전이다. 작품을 통해 작가를 사로잡은 의식의 흐름을 확인하는 일은 흥미롭다. 요즘도 자정까지 작업한다는 배 관장은 그림을 그리면서 스트레스를 풀어낸다고 한다. “14m 그림 그리려고 여기에 왔다. 십이지신상과 탱화를 뉴욕 구겐하임에서 전시할 계획이다. 1999년 작품전시를 위해 미국을 방문했을 당시 뉴욕 맨해튼에 있는 미술관 구겐하임에서는 피카소나 샤갈처럼 작고한 작가들만 전시하고 있더라. 그걸 보고 살아있는 사람인 나의 작품을 전시하겠다고 결심했다. 구겐하임 미술관 바닥에서 꼭대기까지 모두 내 그림으로 채우리라고. 하하!” 배 관장의 웃음이 시원스럽다.
■ 마을로 내려간 미술관, 주민과 한바탕 어울려 보자
작가가 작품에 너무 심취하면 현실 감각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배 관장은 다시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하고 홍익대 미술대학원에 진학해 박사과정을 밟았다. 박사학위 논문 제목이 ‘빛과 어둠의 관계 미학을 통한 생명력 표현 연구’이다. 그는 다시 탱화예찬론을 편다. “티베트 탱화의 핵심은 보이지 않는 세계이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죽음을 뜻하기도 한다. 죽음의 세계를 어떻게 이미지화할 것인가? 빛과 어둠을 주제로 삼아 죽음의 의미를 풀어냈다. 탱화는 무궁무진하다. 내가 죽기 전에 고려 불화처럼 5m 탱화를 그려볼 작정이다.”
“코로나19로 개관하면서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개관 후 하루도 쉰 적이 없었다. 코로나19가 잦아들면 미술관은 더욱 바빠질 것이다.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더욱 활발히 운영하고, 음악회도 열 계획이다. 주민들하고도 잘 어울리고 있다. 농사지은 것을 바리바리 싸 들고 와서 주고 간다. 시골의 넉넉한 정서가 살아있다.”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10년 후의 아트린뮤지움은 어떤 모습일까? 잠시 침묵하던 배 관장이 천천히 생각을 풀어낸다. “아트린에 가야만 볼 수 있는, 특화된 미술관으로 키우고 싶다. 수준 높은 좋은 전시를 유치하는 것이 핵심이겠다. 후배 작가들을 지원하는 사업을 확대해 나가고, 지역주민들에게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지역 미술관의 역할도 충실히 감당할 것이다. 물론 미술관의 문턱을 낮추는 작업도 계속할 것이다.” 미술관 입구에 걸린 현수막에 새겨진 문장을 떠올린다. “마을로 내려간 미술관-주민과 한바탕 어울려 보자!”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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