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악의로 농담하지 마라

요즘 우리 사회의 언어는 자기모순에 빠진 듯한 극심한 이중성을 보이고 있다. 나와 주위의 언어 표현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수용을 넘어 찬양의 수준으로 받아들이는가 하면, 상대방의 언어가 주는 선의나 비전에 대해서는 폄훼는 물론 조롱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아티샤는 말한다. “악의로 농담하지 말라”고. 11세기에 활동한 아티샤가 이미 그와 같은 경구를 남겼다는 것은 이것 또한 오래된 인간의 습속인가도 싶다. 아티샤는 동인도 사호르 국의 왕자로 태어났으나 왕위를 계승하지 않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어 나란타의 대논사가 되었다. 그는 티벳으로 가서 가르침을 전하였는데 그의 ??수심요결??에 이 말이 중요한 가르침으로 나온다.

아티샤는 붓다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고 또한 선(禪) 쪽의 사람들도 같은 맥을 잇고 있다. 악의로 농담하지 말라는 이 경구는 농담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농담으로 사람을 다치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농담의 이면 심리를 깊이 파고들어가 농담 뒤에 숨겨져 있는 근본 이유를 살피라는 것이 그가 뜻하는 바이다. 아티샤로부터 천 년이나 지난 후에 프로이트가 나타나서 아티샤의 그 일을 다시 했다. 프로이트가 생각하기에는 사람들이 누군가를 소재로 농담할 때는 농담의 대상이 되는 그 사람을 향한 분노가 있고 그 사람을 공격하고 싶어하는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는 것이다. 농담 형식을 빌려 우회적으로 익살스러운체하기는 하지만 진짜 동기는 공격하는 데에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실제로 아티샤가 의미하는바 역시, 말로라도 폭력적이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농담으로라도 폭력적이지 말라는 의미이다. 폭력은 폭력을 부르고, 분노를 부르면서 끝없는 악순환에 빠져들어 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에 대해서 외견상으로는 진짜 동기를 타자는 정확히 알 도리가 없지만 그러한 의도의 농담을 하는 자신은 알고 있다. 만약 마음에 누군가를 해치고 싶고 공격하고 싶은 고의적인 의도가 있을 때는 그것을 농담으로 표현하지 마라, 그러나 그렇지 않고 순수한 익살 감각에서 그저 재미로 하는 농담이라면 그리고 이 인생을 너무 무겁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감각에서 우러나오는 농담이라면 전혀 문제 될 게 없으며 주위를 유쾌하게 한다.

순수한 익살은 전혀 난폭하지 않게 농담으로 표현할 수 있다. 가끔은 표현상으로 난폭하게 보이더라도 듣는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농담하는 사람의 의도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헤치기 위하여 웃을 수도 있는데, 그런 웃음은 잘못이 된다. 폭력적 의도를 숨기는 비열한 전략은 결국 폭력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속 깊이에 인생에 대해서 더 많은 즐거움과 더 많은 웃음을 자아내고 싶은 바람이 전제되어 있다면 무엇이든지 덕스러운 일이 될 수 있다. 아티샤가 말하고자 하는 전부는, 고의로 사람을 해치기 위하여 남의 잡담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잡담은 농담도 아니고 재미도 아니고 익살도 아닌 폭력이기 때문이다.

최성규 철학박사ㆍ한국미술연구협회 이사장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