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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키자! 미래유산] ⑧수원 ‘구 농촌진흥청’, 정조대왕 뜻을 계승한 근대농업 발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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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키자! 미래유산] ⑧수원 ‘구 농촌진흥청’, 정조대왕 뜻을 계승한 근대농업 발상지

▲수원특례시 권선구 서둔동에 위치한 구 농촌진흥청. 

여러분은 근대건축물을 어떻게 보시나요. 누군가는 미래유산으로 보고, 누군가는 흉물로 볼 테죠. 견해가 서로 다른 까닭에, 그동안 수많은 근대건축물이 보존이냐, 철거냐기로에 서서 온갖 수난을 겪어내야 했습니다. 안타까운 건 개중에 문화재로 가치가 높은 것들이 소실됐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지역의 역사와 정체성을 담은 귀중한 근대문화유산을 앞으로 얼마나 더 허무하게 잃어버릴지 모릅니다. 그래서 시작합니다. 꼭 지켜야 할 미래유산을 찾아가는 여정을. 1876(개항기)에서 1970년 사이에 지어진 경기도의 근대건축물을 중심으로 문화재로 등록되지는 않았지만, 미래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것들을 발굴해 보존 대책을 찾아보려 합니다. 선조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그대로 우리도 후손에게 온전하게 물려줄 수 있길 바라며.

편집자주

 

수원을 농업기술 메카로 자리매김 시킨 농촌진흥청. 비록 2014년 전주로 이전했지만, 사용했던 터와 건물들은 권선구 서둔동에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새 주인들이 들어와 여기저기 손보고, 문화재 가치가 있는 근대건축물인 구 도서관까지 철거해 위용이 예전만 못하다. 본관과 남은 건물도 언제 훼손될지 모른다. <지키자! 미래유산> 여덟 번째는 정조시대부터 대한제국 시기를 거쳐 지금까지 이어온 한국 농업의 산실 구 농촌진흥청을 재조명한다.

 

 

정조대왕의 농업개혁 정신이 깃든 터

▲ 구 농진청 본관 건물은 현재 국립식량과학원 중부작물부와 농업기술역사관이 사용하고 있다.
▲ 구 농진청 본관 건물은 현재 국립식량과학원 중부작물부가 사용하고 있고, 일부는 농업기술역사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지난 10일 한때 수원을 상징했던 구 농촌진흥청을 찾았다. 정문에 들어서니 본관 건물이 바로 보였다. 2000년대 초반 마지막으로 사용했던 농업은 생명 농촌은 미래라고 적힌 캐치프레이즈가 그대로 적혀있지만, 지금은 국립식량과학원 중부작물부가 사용하고 있고 일부 공간은 농업기술역사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농진청의 역사는 정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원문화원에서 2019년 발행한 <수원의 옛 건물과 문화>에 따르면 정조대왕(조선 제22)은 재위 2년째에 국가 운영의 근간인 농사가 가뭄 때문에 날로 피폐해지는 현실을 걱정하며 신하들에게 해결책을 물었다.

사람의 근력으로 토지에서 생산되는 재물을 늘어나게 하는 것이 농사다. 농사는 백성들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고 국가의 경제를 부유하게 하는 것이니, 농사에 대한 의견을 올려라

 

▲ 1962년 농촌진흥청 발족 당시 여기산 아래 축만제의 모습이 담긴 전경 사진. 농촌진흥 50년사 발췌.
▲ 1962년 여기산과 축만제 옆에 발족한 농촌진흥청 모습이 담긴 전경 사진. 자료=농촌진흥 50년사 

이 같은 질문에 다산 정약용이 내놓은 답은 농책(農策)’이다. 정조는 농책을 토대로 1799년 수원화성의 서쪽에 백성들이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축만제(祝萬堤)를 축조했다. 축만제는 여기산(麗妓山) 아래 있는 인공호수로, 서호(西湖)라고도 불린다. 축만제가 조성된 후 백성들은 가뭄이 들어도 안정된 농업을 영위할 수 있었다.

현재는 시민들의 쉼터인 서호공원으로 이용되고 있고 옆에 농진청이 자리하고 있다. 농진청은 바로 정조의 호호부실(戶戶富實)’ 꿈이 담긴 농업개혁 뜻을 바로 그 자리에서 계승한 셈이다.

축만제는 2016년 국제배수위원회(ICID)에서 세계 관개시설물 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세월이 흘렀어도 정조대왕의 농업정책이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게 된 것이다. 8년 전 농진청이 전주로 이전해 건물만 남았지만 한국 농업의 뿌리로서 상징성은 변함없다.

 

 

대한제국 시기 설치된 권업모범장서 근대 농업 새출발

▲ (위)일제강점기 때 권업모범장. (아래) 1908년 순종황제가 권업모범장에 행차한 모습.
▲ 일제강점기 때 권업모범장(위). 1908년 순종황제가 권업모범장에 행차한 모습(아래). 자료=수원의 옛 건물과 문화, 농촌진흥 50년사

대한제국 시기에는 이곳에 권업모범장을 창설해 농사의 중요성이 계속 강조되어 왔고, 이후 농촌진흥청이 설치돼 그 맥을 이어왔다.

<농촌진흥 50년사>에 따르면, 1884년 우리나라 최초로 개설된 종합농업시험장인 농무목축시험장이 서울 인근에 존재했다. 하지만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일제 통감부는 우리나라 농업구조를 개편시켰다.

고종 43년인 19064통감부권업모범장관제를 발표하고, 같은 해 615일 당시 행정구역상으로 수원군 일형면 서둔리였던 이곳에 권업모범장(초대장장 혼다 신스케)’이라 명칭한 농업기관을 창설했다.

축만제가 있는 너른 들판을 낀 이곳은 정조대왕 이래 한반도 전통농업의 요람 구실을 했던 터여서 일제 역시 이 역사를 무시할 수는 없었나보다. 이렇듯 한국 근대농업은 역사지리적 특징을 매개로 같은 장소에서 새 출발 한 셈이다.

일제는 당시 농민들에게 농사개량이라고 주입시켰지만 사실은 농업을 일본 자본주의 체제로 확고하게 편입시키기 위한 것으로써 일본의 농법을 그대로 이식했다. 통감부권업모범장관제에는 권업모범장은 우리나라 농업의 발달·개량을 위한 시험, 물산의 조사와 농업상에 필요한 물료의 분석과 감정, 종묘 등의 배부 등을 관장 한다는 내용이 있다.

하지만 권업모범장은 시험·조사보다는 지도·권장에 중점을 두고 운영됐고,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면서 다시 조선총독부 산하가 됐다. 학자들은 권업모범장이 우리나라 농업발전에 기여한 바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일제의 식민지 농업정책 수행에 있어서 첨병 구실을 한 기관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 본관 앞마당 정원에 세워져 있는 '권업모범장' 표석.
▲ 본관 앞마당 정원에 세워져 있는 '권업모범장' 표석.

이곳이 권업모범장이었음을 알리는 표석이 현재 본관 앞마당 정원에 보존돼 있다. 표석은 세 개다. 가장 왼쪽 기단 위에 대를 세운 직육면체 화강석과 가운데 마름모 기둥에는 한자로 勸業模範場(권업모범장)’이라 음각돼 있다. 1906년 권업모범장이 세워질 때 길 가 쪽으로 설치되었던 표석인 듯하다. 1990년 농진청 국립식량과학원 답작(논농사)포장 공사현장에서 출토됐다.

맨 오른쪽은 표석이라기보다는 흉상을 세웠던 모양을 하고 있다. 1998년 농진청 공사현장에서 출토됐는데 얼굴 형태는 없이 글자가 적힌 기둥만 발견됐다. 현재의 직원들은 권업모범장 초대장장의 흉상이 있었던 동상이라 짐작하고 있다.

권업모범장은 19299월 농사시험장으로 개칭됐고, 일제 말기인 1944년 농업시험장으로 개편했다. 해방 후인 1946년엔 미 군정청에 소속된 중앙농사시험장이 되었다가, 1957년엔 농사원이 발족했다. 농촌진흥청이 된 것은 196241일이다.

이처럼 이름과 명칭은 숱한 변화를 겪었다. 기구와 조직도 많이 바뀌었으나, 한국 농업의 근대화와 과학적 발전을 꾀한다는 기본 목적만큼은 권업모범장시절 이래 한결같았다. 권업모범장 표석은 이 모든 과정을 말없이 지켜봤을 것이다.

 

 

역사성·건축성 뛰어난 본관구 농사시험장

1962년 농진청 발족당시 본관 전경. 자료=농촌진흥 50년사
▲ 1962년 농진청 발족당시 본관 전경. 자료=농촌진흥 50년사

몇몇의 농진청 직원들은 본관이 권업모범장이 시작된 자리라 추정하고 있다. 본관 신축은 1958년 유엔계발계획(UNDP)의 한국농업진흥 사업의 일환으로 시작됐다. 당시 명칭으로는 농사원이다.

전체 공사는 1959년 착공해 1962년 완공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본관은 김정수 연세대 건축공학과 교수의 설계로 196110월에 준공됐다. 건물 규모는 6,285. 원래는 3,104로 현재 보다 작게 지어졌으나 나중에 증축했다. 1962년 완공 후 사진과 대조해 보면 좌우 양측이 증축된 것을 알 수 있다.

▲ 1. 정문 쪽에서는 2층으로 보이는 본관 정면 모습. 2. T자형 지붕과 가느다란 기둥이 지지하는 구조의 현관 포치. 3.  서호공원에서 바라보면 3층으로 보이는 본관 후면 모습. 4. 본관 좌측면. 

좌우로 길게 지어진 본관 건물은 학교 건물을 연상시킨다. 정문으로 진입해 앞면을 보면 2층 건물로 보이지만 뒤에서 보면 지하 1층이 더 있는 총 3층의 건물이다. 현관 포치(돌출된 입구)는 가느다란 기둥 6개가 지지하는 구조다. 포치 상부는 T자형의 얇은 지붕이 길게 덮여 있다. 흰색으로 길게 이어진 수평 벽면에 수직으로 긴 유리창이 건물 끝에서 끝까지 이어져있다.

학자들은 이 건물이 근대건축이 갖춰야 할 몇 가지 원칙 중 평활한 입면(외벽)’, ‘수평으로 긴 창이라는 조항을 충실히 실행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 농진청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 '구 농사시험장' 정면(위)과 배면(아래).

정문 옆에는 농진중앙회한국생활개선중앙연합회라는 현판이 붙은 적벽돌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이 현재 농진청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꼽힌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 건립됐으며, 1944년 농사시험장 종합분석실로 사용됐다. 이후 세종사업단이 이용했다.

규모 6492층으로 된 이 건물은 농진청 담장 쪽에 가까이 위치해 있고 현관이 외부 도로 쪽을 향해있다. 전면을 조적조처럼 보이지 않도록 조형미를 살리고 흰색 칠을 해 놓았으나, 옆면과 뒷면은 한눈에 붉은 벽돌임을 알 수 있다. 외벽 상단을 살펴보면 굴뚝이 뒷면에 두 개, 옆면에 하나 설치돼 있다. 학계는 중앙정부가 보유한 시설 가운데 현존하는 유일의 일제강점기 건물로 역사적 보존가치가 크다고 평가한다.

 

 

농진청 구 농사시험장 등록문화재 지정 추진

▲ 1992년 농진청 사진 속에는 본관 우측에 자리했던 옛 도서관 건물의 철거 전 모습이 일부분 담겨있다. 자료=농진청 50년사

본관 오른쪽에도 한국 근대건축사의 대표 건축물로 평가받았던 1960년대 건물 옛 도서관이 있었다. 그러나 20191014일 철거되고 그 자리는 지금 주차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철거 후 학계와 정계에서는 근대 문화유산 일부가 허무하게 사라진 걸 크게 아쉬워하며, 가치를 몰라보고 없앤 농진청을 강하게 질타했다. 더불어 남은 본관과 구 농사시험장 건물마저 철거될까 우려하고 있다.

안국진 경기도 문화재위원(수원시정연구원 박사)농업의 본고장에 농진청 시설이 남아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가치가 있다. 당시 엘리트주의라고 하는 우리 건축계를 이끌었던 초창기 건축가의 작품성도 여기 녹아 있다. 국가등록문화재로도 손색이 없기 때문에 농진청이 이를 인지하고 보존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일침했다.

이에 대해 지난 15일 농촌진흥청 측은 구 농사시험장 건물에 대해선 등록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중부작물부 업무시설로 사용하고 있는 본관동 건물은 문화재 지정 시 시설 개보수 등의 어려움이 있어 지금처럼 보존할 예정이라고 공식적인 답변을 내놨다.

 

·사진=황혜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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