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윤극영 선생의 동요 ‘반달’ 노랫말은 애닯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로 시작되는 이원수 선생의 ‘고향의 봄’은 더 그렇다. 읊으면 읊을수록 코끝이 시큰해진다.
▶동요를 소환한 까닭은 이 작품들이 태어날 수 있었던 플랫폼 얘기를 하기 위해서다. ‘소년(少年)’이란 한자어는 투박하다. 완전히 성숙하지 않은 사내아이란 뜻이다. ‘어린이’라는 순수한 우리말이 널리 쓰이기 시작하면서 그 투박함은 사라졌다. 같은 이름의 잡지가 창간됐기 때문이다. 1923년 3월이었다. 일제강점기였다. 그 암울했던 시기에 소년들을 대상으로 매월 발간되는 잡지는 한줄기 빛이었다. 아동문학가 소파(小波) 방정환 선생 덕분이었다.
▶창간된 뒤 9년 만인 1934년 7월 통권 122호로 폐간됐다. 이 잡지를 통해 우리 문학에 새로운 장르가 등장했다. 동요·동화다. 최초로 우리 민족의 정서가 오롯이 담긴 동요·동화들이 실렸다. 한국 아동문학의 본격적인 출발선을 그었다. 1925년을 전후해 동요 황금시대도 열렸다.
▶잡지 ‘어린이’가 단순한 아동문학 동인지를 넘어 소년인권운동을 펼쳤다는 평가도 나온다. 식민지배 저항운동 성격을 띠었다는 분석도 그렇다. 최미선 경상국립대 교수의 논문을 통해서다. 최 교수는 ‘어린이’와 당시 조선총독부가 매월 검열 내용을 수록한 ‘조선출판경찰월보(월보)’를 분석, 이처럼 결론을 내렸다.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 창간호 발행일자를 3·1절 기미독립선언 기념일에 맞추려고 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검열로 1923년 3월20일 첫 발행이 이뤄질 수 있었다. 지속된 일본 경찰의 검열 흔적은 사고(社告)란을 통해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도대체 잡지에 어떤 내용이 담겼길래 그랬을까. 1926년 9월 발행된 사고란에는 잡지의 모회사인 ‘개벽’이 발행금지를 당했다는 내용도 실렸다. 1928년 3월에는 총독부 경무국으로부터 압수명령을 받아 전국의 서점 350여곳에서 모두 몰수당했다.
▶소파 선생은 아동문학가 정도로만 알려졌지만, 사실은 잡지 ‘어린이’를 통해 독립운동을 펼쳤다. 어린이날은 그래서 무릇 또 다른 이름의 독립운동이었다. 그런 어린이날이 올해로 100주년을 맞는다.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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