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나라 사랑하는 마음 새기는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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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도일 스님

‘호국의 달’인 6월이 되면 마음이 아프다. 1950년 6월25일,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군인과 민간인이 숨지거나 다쳤기 때문이다. 꽃다운 나이의 젊은이들이 속절없이 세상을 떠났고, 그 가족들은 피눈물을 흘린 민족의 대비극이었다.

나의 은사인 초안 큰스님도 한국전쟁에 참전해 입은 부상 후유증으로 평생 돌아가실 때까지 병고에 시달렸다. 상이용사이면서도 위의(威儀)를 잃지 않고 여여한 모습을 보여주셨지만 육체적 고통을 피하기는 힘들었다. 그래도 “나라를 지키다 다친 것이니, 후회는 하지 않는다”면서 “다시는 이 땅에 전쟁같은 비참한 일이 있어선 안된다”고 힘주어 강조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라를 지키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고 부상당한 분들의 뜻을 기리는 것은 우리들의 당연한 도리다. 그분들이 없었다면 어찌 우리가 지금의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겠는가? 한국전쟁 당시 초개와 같이 육신을 던진 용사(勇士)들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나선 지사(志士)들의 숭고한 정신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앞서 밝힌 대로 나의 스승 초안 큰스님은 한국전쟁 참전용사다. 북한 강원도 평강군 남면 천마리에서 태어나 출가했지만,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38선을 넘어 혈혈단신 남쪽으로 넘어왔다. 세간(世間)에 초연해야 하는 스님의 신분이었지만 “나라 없는 종교는 있을 수 없다”는 소신으로 국군에 입대해 병역을 마쳤다. 그런데 전역 직후인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또 다시 자진 입대했고, 전투를 치르면서 부상을 입어 평생 불편한 몸으로 지내야 했다.

초안 큰스님의 이러한 뜻은 동암 대종사에게 받은 영향이 컸다. 동암 대종사는 초안 큰스님의 스승으로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한분이었던 백용성(白龍城) 조사의 제자다. 동암 대종사는 출가도량인 남양주 봉선사 운허대종사를 비롯해 여러 스님들과 함께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45년 해방 후 상해임시정부가 환국 할 때 김구 주석을 비롯한 요인들을 환영하기 위해 구성된 ‘임시정부 환국봉영회’의 대표(회장)를 맡기도 했다.

1945년 12월12일 서울 대각사에서 임시정부 환영행사가 열렸는데, 김구 주석을 비롯한 요인들과 동암 대종사가 함께 촬영한 빛바랜 사진이 지금도 전한다.

초안 큰스님께 들은 일화가 떠오른다. 동암 대종사가 양양 낙산사 주지로 있던 1960년대 중반, 정부에서 독립유공자로 포상하겠다는 연락이 왔지만 정중하게 사양했다는 것이다. 동암 대종사는 “나라를 위해 당연히 할 일이었고,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한 것이 아니다. 출가자로 포상을 받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여전히 남북이 대치돼 있고, 주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처한 상황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동암 대종사와 두 번이나 군대에 가서 부상당한 은사스님 같은 분들의 나라 사랑 정신을 떠 올릴 때면 숙연해진다.

한국전쟁으로 사실상 폐사(廢寺) 위기에 처한 오봉산 석굴암도 이러한 동암 대종사와 은사스님의 마음이 깃든 도량이다. 후대(後代)에 문화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는 도량으로 장엄하는 것이 선대(先代)의 뜻을 잘 받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 희생된 호국영령과 무고하게 희생된 민간인 영가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며 하루 속히 남북통일이 되기를 부처님 전에 기도한다.

오봉도일 스님 25교구 봉선사 부주지·양주 석굴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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