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미심쩍었다. 그래도 믿었다. 애초부터 동포의 또 다른 선의(善意)라고 판단한 게 착각이었다. 타 민족의 압제 속에서 재산을 보호해준다고도 했다. 그래서 스스럼 없이 맡겼다. 침략자에 맞서는 동료들의 신상도 거침없이 넘겼다.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서”라는 궤변(詭辯)에도 깜빡 속았다.
▶그렇게 몇년이 흘렀다. 그런데 아니었다. 뒤통수를 맞았다. 한마디로 철저한 계산 속에 이뤄진 사기였고, 매국행위였다. “조국을 위한다”는 입발림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오로지 자신의 입신영달(立身榮達)을 위해서였다. 민족을 팔아 몇해 못 갈 싸구려 권력에 엄청난 재산까지 모았다. 이 때문에 숱한 동포들이 스러졌다. 그들의 인생 자체가 무너졌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네덜란드 비밀경찰이었던 안드리스 리파겐(Andriss Riphagen)의 수치스러운 행적이다. 그는 나치가 점령한 조국에서 유대인·레지스탕트 은신처를 찾아내고, 그들의 재산을 빼돌렸다. 리파겐은 민족반역자들 가운데 우두머리였다. 원래는 네덜란드의 갱스터이자 정치 깡패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나치가 들어오자 부역자로 변신했다.
▶1939년 이후에는 게슈타포 앞잡이 노릇도 했다. 유대인 3천190명이 그의 손에 의해 나치에 넘겨졌다. 많은 레지스탕스 조직도 와해됐다. 유대인들을 색출하는 일도 맡았다. 유대인들을 속여 안심시킨 후 그들의 재산도 빼돌렸다. 다른 부역자들이 유대인 재산을 넘겨주면 그 수익을 일정량 나눴다.
▶종전 후 수배됐지만 독일의 정보를 넘기는 조건으로 민간 포로 신분이 됐다. 그래도 자신의 민족반역행위를 뉘우치는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나 보다. 1946년 타인의 여권으로 벨기에와 스페인 등을 거쳐 아르헨티나로 탈출했다. 네덜란드 정부가 그를 추적했지만, 이미 1973년 스위스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75년 전 네덜란드의 역사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의 행적을 따라 가보면 숱한 친일파들의 얼굴이 오버랩된다. 튤립과 풍차와 거스 히딩크 등을 빼놓고 우리는 네덜란드에 대해 과연 어느 정도나 알고 있을까. 오늘은 이 나라와 수교한지 61년째를 맞는 날이다.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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